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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1631년말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미 헨드리크 오일렌부르그라는 암스테르담의 미술상과 거래를 텄고, 반 혼토른스트의 우세한 지위에 눌려 헤이그 궁정에서 출세할 전망은 어두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수도이며 사실상의 도시국가인 암스테르담의 번영은 그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주로 오일렌부르그의 소개를 통해 렘브란트는 당장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인기있고 비싼 초상화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렘브란트는 자기를 받아들인 이 도시의 섭정들, 즉 정치권력과 영향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상인귀족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초기에 거둔 성공을 말해주는 증거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1632)를 주문받은 것이었다.
당시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동업조합은 명성이 드높은 의사 한 사람을 초빙하여 조합원들 앞에서 인체를 해부해보이는 행사를 연례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이 그림은 그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주문 제작된 것이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이 대형 단체초상화는 제작된 이후 줄곧 사람얼굴을 순서에 따라 한 줄로 배열하는 규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렘브란트는 피라미드 구도와 강의 자체의 실제과정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극적인 조명을 통해 주제를 살렸다.
동시에 그는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으로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그의 상징이 된 암시적 심리상태를 그들에게 부여했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 온 직후에 그린 개인·부부 초상화에서도 이와 같은 특징을 거의 발견할 수 있다.
렘브란트는 레이덴에 있을 때에는 초상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지만, 암스테르담에 온 뒤 4년 동안 약 50건의 초상화 주문을 받았고, 그 대부분은 사례금이 아주 많았다. 니콜라스 툴프는 외과의사일 뿐 아니라 암스테르담 시의회 의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섭정 그룹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렘브라트가 잠시 함께 살았고 동업자 관계를 맺은 미술상 오일렌부르그도 섭정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렘브란트의 초상화 모델들(예를 들면 1632년의 마르텐 로텐)은 대부분 종교적 보수주의자인 메노파교도였던 것 같다.
그는 오일렌부르그를 통해 메노파교도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는데, 이들은 암스테르담 섭정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또한 암스테르담에 온 뒤 처음 10년 동안 많은 네덜란드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 즉 레몬스트란트파의 요한네스 오이텐보가르트(1633), 칼뱅파의 요한네스 엘리손(1634), 메노파의 코르넬리스 안슬로(1641) 등을 그렸다.
신화를 주제로 한 그의 그림으로는 〈안드로메다 Andromeda〉(1630경)· 〈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 Pluto and Proserpina〉(1632경)· 〈오이로파의 약탈 Rape of the Europa〉(1632경)· 〈가니메데스의 약탈 Rape of the Ganymede〉(1635) 등이 있다.
그의 신화 그림들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섬세하게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다. 신화를 다룬 렘브란트의 그림이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면, 성서를 주제로 다룬 그림은 광범위한 주제와 연출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별난 주제들, 특히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와〈다니엘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동양 의상과 극적인 몸짓 및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가득 차 있는 대작 〈벨사자르의 잔치 Belshazzar's Feast〉(1635경)도 이런 종류의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 그림에 적혀 있는 정확한 히브리어는 렘브란트가 또다른 종교지도자이며 세계교회론을 주장하고 지복천년을 믿는 므나쎄 벤 이스라엘을 통해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렘브란트는 1636년에 메나세의 초상화를 에칭으로 제작했다. 렘브란트의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 Sacrifice of Isaac〉(1635,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그와 똑같은 생생함과 활력이 담겨 있다.
이 그림에서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손이 천사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멈추고, 그 손에 들린 칼은 허공에 떠 있는 채 이 장면에 사진 같은 박진감을 부여하고 있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존되어 있는 이 그림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끄는 사실은 독일 뮌헨에도 이 그림을 약간 수정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뮌헨의 그림에는 "렘브란트, 고치고 덧칠하다"라는 애매한 서명이 들어 있다. 이것은 렘브란트 자신도 1630년대 오일렌부르그의 작업실에서 재고 작품을 모사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1630년대에 렘브란트는 성서를 주제로 한 야심만만한 에칭을 개발했다. 이런 경향의 첫 출발은 프레데리크 핸드리크를 위해 그린 그림을 에칭으로 다시 제작한 1633년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에서 이미 엿볼 수 있고, 1630년대 중엽에 렘브란트와 오일렌부르그는 수요가 많은 대형 에칭 연작을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던 것 같다.
렘브란트는 에칭 작품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Christ Before Pilate〉(1636)를 제작하기 전에 미리 회색과 갈색의 유화 스케치(1634)로 조심스럽게 판화의 원형을 만들었다. 화포에 그린 또다른 유화 스케치 〈설교하는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 Preaching〉(1634경)은 끝내 판화로 완성되지 않았다.
폐허를 배경으로 선명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인물들은 1633년에 세상을 떠난 라스트만의 공식을 연상시킨다. 풍부하고 짙은 색조에 숙달된 솜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야심만만한 에칭은 1634년에 제작한 〈목동들에게 이른 예수 탄생 소식 Annunciation to the Shepherds〉이다.
이 판화에서도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고유한 요소를 덧붙여 양치기를 소치는 목동으로 바꾸었다. 이 목동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천사의 모습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가 에칭에서 시도한 실험의 특징은 이 판화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바로 빛과 어둠을 일부러 뒤바꾸는 것이다.
이 판화에서 그는 진한 윤곽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한 색조를 이용하거나 연마기로 윤곽선을 지움으로써 형태와 광휘점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는 듯한 효과를 내는 이 기법은 렘브란트가 후기에 제작한 가장 감동적인 종교적 판화의 특징이 되었다.
렘브란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 가운데 일부(클레베 출신의 고베르트 플링크, 하를링겐 출신의 야콥 바커, 도르드레흐트 출신의 페르디난드 볼)는 1630년대말에 작성된 암스테르담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플링크(1615~60)는 수집가들을 위해 렘브란트의 몇몇 그림을 복제했거나 작업실에서 렘브란트와 함께 공동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화와 초상화 및 '트로니'에 대한 렘브란트의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그후 오랫동안 그의 제자들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1634년 6월 22일에 결혼했다. 신부는 헨드리크 오일렌부르그의 조카이며 레바르덴 시장의 딸인 사스키아 오일렌부르그(1612 출생)였다. 사스키아는 상당한 지참금만이 아니라 높은 사회적 지위도 가져왔기 때문에 이 결혼으로 렘브란트의 사회적 지위도 상당히 높아졌다.
결혼 당시 렘브란트와 헤이그 궁정의 관계는 가장 우호적이어서 이 결혼은 사회적으로 대등한 남녀가 배필을 이룬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부부가 처음 만났을 때 사스키아의 보호자였던 사촌오빠는 개신교 목사인 요한네스 코르넬리스 실비우스였다.
실비우스가 죽은 뒤 렘브란트는 1646년에 그의 초상화를 에칭으로 제작했는데, 환상적인 타원형 창틀에서 힘차게 나타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1630년대에 가장 많은 초상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사스키아였다. 렘브란트는 아내에게 신화적인 매무새, 특히 수많은 꽃으로 꾸민 꽃의 여신 플로라의 의상을 입혀 모델로 삼았고(1634), 몸가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정식 예복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자연스럽고 가정적인 그림의 주인공으로도 자주 등장시켜 아내가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거나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의 인생에 일어난 몇 가지 불행을 알고 나면, 이 침대장면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스키아는 세 아이를 잃은 뒤 1641년에 아들 티투스를 낳았고 그로부터 1년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혼과 더불어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1630년대의 자화상은 자신감과 행복으로 환히 빛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1640년에 그린 피라미드 구도의 당당한 자화상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자화상은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모델은 시인 아리오스토라고 알려져 있음)에서 난간에 기댄 차분한 몸짓을 차용했을 뿐 아니라 라파엘로가 그린 궁정 신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에서는 그 화려한 옷차림과 황금빛 색깔의 조화를 빌려왔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의 독특한 2인 초상화(1635경~36)는 자신의 인생을 냉정하고 사려깊게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그림도 에칭으로 제작되었지만, 1636년에 에칭으로 제작된 2인 초상화에서 렘브란트는 관객을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드레스덴에 있는 그림에서 사스키아는 멋지게 차려입은 렘브란트의 무릎 위에 앉아 있고, 렘브란트는 맥주병을 유쾌하게 들어올린 채 고개를 돌려 그림 바깥쪽을 바라보면서 바보처럼 히죽 웃고 있다.
이 선술집 배경은 상류계층의 숙녀들을 고급 창녀(렘브란트가 이미 사스키아와 결부시킨 꽃의 여신 플로라의 또다른 화신)로 표현하는 당시의 '아르카디아' 유행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선술집 매춘부들과 함께 있는 탕아를 주제로 한 그림의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
이 남녀의 사치스러운 옷차림은 카셀에 있는 사스키아의 반면상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흉내내고 있지만, 탕아의 비유를 통해 방탕한 생활과 그로 인해 있을 장래의 후회를 암시함으로써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렘브란트는 드레스덴에 있는 2인 초상화의 과시적 소비를 강조하듯 1639년에 요덴브레스트라트에 있는 커다란 저택을 한 채 사들였다. 이 집은 지금도 렘브란트의 집이라고 불리며, 오늘날에는 그의 기념관으로서 많은 에칭이 보존되어 있다.
같은 해 귀족이자 민방위대장인 프란스 반닝 코크는 나중에 렘브란트의 대표작으로 가장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야경'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그룹 초상화)를 주문했다.〈야경 Night Watch〉의 암스테르담에 알맞는 정식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방위대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이다.
1640~42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민병대 머스킷 총 부대(쇠뇌 사수대와 궁수대와 함께)의 새로운 본부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6점의 민방위대 단체초상화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단체초상화 가운데 2점은 렘브란트의 제자인 플링크가 그렸고, 3번째 초상화는 플링크의 경쟁자인 바커가 맡아서 그렸다.
〈야경〉의 모델들은 반닝 코크와 그의 부하 빌렘 반 로이텐부르그(그림 전면에서 조명을 받으며 행진을 이끌고 있는 두 사람)가 이끄는 대원들로 대부분 암스테르담의 포목상 구역에 모여 사는 부자들이었다.
10년 전에 그린 단체초상화 〈해부학 강의〉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의 민방위대 단체초상화는 장면 전체를 하나의 역동적인 행위로 수렴하여 생기와 활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네덜란드 그림과는 다르다.
개선문 앞으로 나오고 있는 민방위대는 특별한 임무를 띠고 출발하는 것처럼 보여 16세기말에 일어난 네덜란드 혁명의 영광된 날들을 상기시킨다. 민방위대의 활동은 과거에 성문을 지켰던 무장수비대와 이제 스스로 자기 도시의 독립과 특권을 지키는 암스테르담 시민을 비교하게 된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그의 그림들 가운데 가장 큰 이 그림(원래 크기는 약 4.5m×5m였고, 왼쪽 가장자리가 꽤 많이 잘려나갔지만 그래도 그의 그림 가운데 가장 큼)에서 역사와 초상화, 활동과 묘사를 결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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