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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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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2006년 7월 23일 마르 6, 30-34. 예레 23, 1-6.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구원을 볼모로 사람들을 율법준수와 제물봉헌에 얽매여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지키고 제물 바칠 것을 요구하는 하느님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율사와 성전에서 제물 봉헌을 주관하는 제관들은 율법과 성전을 이용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제국은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세금을 잘 바치는 한, 식민지의 자치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식민지가 되면서 유대아에는 왕을 중심으로 한 통치 체제는 사라졌고, 율사와 제관을 실세로 한 유대교 조직이 유대아의 자치조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 속하는 유대인이었지만, 그 시대 율사와 제관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그들을 “눈먼 길잡이들”(23,16)이라고 혹평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도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율사와 제관들은 백성을 돌보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율법준수와 제물봉헌만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을 은폐하고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지키고 바칠 것만 요구하는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자비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하느님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버린 죄인들도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으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해 예수님에게 보고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기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기억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문서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제자들의 삶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전도 활동 후, 예수님에게 와서 보고합니다. 이제 그들은 율법과 성전에 준해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준해서 실천하고, 예수님에 준해서 반성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열어놓은 시야가 그들 삶의 장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시야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것만 보이는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시야로 들어가자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수고하며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11,28). 예수님에게 오는 사람은 우리의 일과 성취욕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쉰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는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기억하라는 뜻이었습니다(호세 11,1; 예레 3,19 참조).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예레미야예언서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한 다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절을 가장 큰 축일로 기념한 것도 우리의 좁은 시야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만 보이는 좁은 시야에 갇히면, 하느님은 아버지로 생각되지도 않고, 하느님이 은혜롭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는 무서운 분이 되고, 사람은 그분 앞에 지키고 바쳐서 많은 혜택을 얻어내고자 하는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는 그분의 은혜로우심에 대한 감사의 뜻이 들어 있고, 그 감사는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롭게 행동함으로써 체험되고 또한 표현됩니다. 오로지 지키고 바치는 일에 얽매인 사람은 감사도, 은혜로움도, 자유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노예와 같은 자세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에게 와서 참다운 자유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대들은 내 벗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요한 15,14-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할 일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은혜롭게 살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벗인 그리스도 신앙인들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역사 안에 살도록 노력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재물 혹은 권력이 우리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보여서 그런 것에 욕심을 내고 애착하다가 자유로운 시선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수양하지 못하면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비굴하게 또 혼신의 힘을 다 하여 매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한 사람만 보이는 시야를 벗어나서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면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것을 하느님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8,31-32)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느님은 측은히 여기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웁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속물근성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예수님에게서 자유를 배워 하느님의 진리를 살게 해 줍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는 데에 우리가 할 수양이 있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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