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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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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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9-23 ㅣ No.149923

 

 

2021년 9월 23일 목요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9,7-9)

   

 

1독서<집을 지어라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리라.>(하까1,1-8)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板璧)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화답송 시편 149,1ㄴㄷ-2.3-4.5-6과 9(◎ 4)

◎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새로운 노래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7-9)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2,19-20)와 복음(마태 16,24-27)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까이1,1-8)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4)

 

하느님께서는 강조적 의미를 전달하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성전 재건을 중단하여 무너진 채로 내버려둔 선민 이스라엘의 영적 무관심과 나태함을 꼬집고 계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무너진 성전과 번듯하게 서 있는,  판벽으로 된 이스라엘의 집을 비교하시면서, 그들이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기적인 태도로 자신들만을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하까이서 1장 4절의 표현은 주어가 강조된 형태이다. 여기서 '주님의 전이'가 원문에는 '이 전이'에 해당하는  '웨합바이트 핫제'(wehabbaith hazzeh)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서술어에 선행하여 강조되어 있으며, 이 표현 자체도 정관사 '헤'(he)와 더불어 지시 대명사(hazzeh; this)가 사용되어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하느님의 집, 바로 그 성전이 이처럼 무너져 있는데'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고 본다.

 

여기서 '무너져 있는데'에 해당하는 '하레브'(hareb; remains a ruin; lies waste) 가뭄으로 타버리거나 바싹 말라 아무런 생명력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 철저히 파괴되어 인적마저 완전히 끊긴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느헤2,17; 예레33,12).

 

포로 귀환 후 성전 재건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적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기초만 놓였기 때문에(에즈4,1-24; 4,12) 여전히 무너진 상태로 놓여 있다고 언급되는 것이다.

 

당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전 재건이야말로 신앙 공동체의 회복의 첫 걸음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처럼 성전이  무너진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회복되지 못하고  무너진 상태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원문은 '하에트 라켐 앗템 라쉐베트 뻬밧테켐 쎄푸님'(haeth lakem athem lashebeth bebathekem sepunim; Is it a time for you yourselves to be living in your paneled houses)이다.

직역하면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을 위해 지붕이 있는 반듯한 집들에서 살 때이냐?' 이다.

 

본문에서는 '너희들'이라는 표현이 거듭 사용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강조되고 있다.

즉 '라켐 앗템'(lakem athem)은 문자적으로 '너희들은 너희 자신들을 위해'라는 의미로서 주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무너져 내버려져 있는 상황에서 좋은 집에 거주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각시켜 그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힘주어 책망하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본절의 첫 단어인 '하에트'(haeth; Is it time)는 하까이서 1장 2절 '때'(시기)에 해당하는 명사 '에트'(eth)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처럼 동일한 단어를 거듭 사용한 것은 성전이 무너진 채 방치된 상황에서 그것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동일한 시기에 자신들은 판벽으로 된 , 즉 지붕과 벽이 완벽하게 구비된 집에 아무렇지도 않게 거주하는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가 얼마나 불신앙적이며,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헌신과 봉헌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선민 이스라엘의 행태는 과거 자신은 향백나무 궁에 살면서 하느님의 궤는 천막 가운데 있음을 안타까워 한 다윗의 모습(2사무7,2)을 떠올리게 하며, 그들이 하느님께 대해 그리고 선민 공동체의 신앙적 재건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 자들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한편 '판벽으로 된'에 해당하는 '쎄푸님'(sepunim)의 원형 '싸판'(sapan) 빈 공간을 덮어서 가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본문에서는 지붕을 덮는 행위를 의미한다(1열왕6,9; 7,7; 예레22,14).

대다수의 영역본들은 이것을 지붕과 사방 벽을 모두 평평한 것으로 덮어 가린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로 번역했다(paneled; cieled).

 

당시 포로 귀환 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기 거주하던 집들이, 완전히 파괴되어 비와 서리를 맞고 무너져 내버려져 있는 하느님의 성전의 모습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향해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현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7-9)

7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 하늘의 길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지적했던 요한을 죽인 헤로데~ 그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 왜요?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두려웠을 텐데~~~그러나 그 두려움 보다 자신의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마귀 들린 이를 치유하신, 또 하혈병 여인이 치유를 받고 죽은 소녀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능력의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나는? 헤로데처럼~ 내 뜻, 내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믿으려 했다, 처음에는~~지금은 누군가 나에게 헤로데처럼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내가 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 하는지~~

 

오늘 바오로 사도의 기도로 확인 하고자 한다.

(에페3,14-21) 14 나는 아버지(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존재)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주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주님 마음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완전)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말씀)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하느님께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사도의 하늘의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닌~ 땅의 것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헤로데와 무엇이 다른가?

 

(마태6,7.9-10) 7그러니~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곧 세상의 것을 위한 기도는 ‘빈말기도’인 것이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느님의 뜻인 세상에서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다른 민족들처럼 주문 외우듯 하여 헛된 세상의 것을 위한 헛된, ‘빈말기도’로 만들어 버렸다.

 

 (코헬렛1,2-9)에서 알려주지 않는가?~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 땅의 모든 영광도 영원히 당의 것일 뿐, 인간의 모든 의로움도 영원한 흙으로 돌아갈 뿐, 하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 인간의 말로 , 듣고, 보는 모든 것이 구원을 주지 못하는 헛되고 헛된 것이기에~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하늘의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처럼 예수님의 기도로 하늘을 담아야 새로운 것이 돼야 하는 것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로마5,21 8,1-4)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4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루카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9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불러 갈릴래아 여러 고을로 파견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열두 제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어서 그들의 복음 선포는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그 당시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통치하던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 (B.C.4~A.D.39)에게 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미치면서,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풍문으로 인해 예수님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영주' 해당하는 '테트라르케스'(tetrarches; tetrarch;  the fourth- hief)는 분봉왕으로서 4분 영주(고대 로마의 한 주(州)의 4분의 1을 다스린 영주)나 작은 나라의 왕을 말한다.

 

헤로데 대왕이 10명의 부인이 있어서 자신의 배다른 왕자들에게 이스라엘의통치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9장 7~9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왕궁 안에서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두루 퍼져 나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당시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먼저 엘리야 예언자나 다른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 온다는 사상이 퍼져 있으므로,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께 대해서 이러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자신이 예전에 죽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복 동기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진언 때문에 그를 죽였으므로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일말의 양심이 있어 불안해졌고,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어했다고 본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내적, 외적 요인들이 많은데 두려움도 그 하나입니다. 두려움은 어떤 현상이나 경험을 예상하면서 가지게 되는 불안한 감정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통해서도 자신의 심리 상태와 자신을 이해합니다.

따라서 두려움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느냐 하는 것은 영성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두려움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해하고 근심 걱정을 하는 사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 합니다(9,7).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9,7-8). 헤로데가 그토록 당황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그 두려움은 사랑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동기로 두려움을 느낍니다.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을 때, 신체 일부를 상실할 것 같을 때, 자유를 통제 받고 잃어버릴 것 같을 때, 다양한 관계에서 버려질 것 같을 때, 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 같을 때 등. 질투, 분노, 죄책감, 수치심, 고소공포증 등도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두려움은 불안을 부르고, 불안은 자기 자신에게 갇히며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후회와 자책을, 미래에 대해서는 근심 걱정을, 현재 삶에 대해서는 선택과 결단을 내리지 못하며 위축되고 열등감에 빠지게 합니다.

헤로데는 두려움 속에서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힘으로 불안을 떨쳐버리려 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기려 하기보다는 육의 경향에 사로잡혀 권력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요한 1서는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4,18) 그렇습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사랑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표지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랑 부족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두려움은 오직 사랑으로만 이겨내야 합니다. 두려움의 자리에 사랑을 채울 때 영적 성장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 외에 그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두려움의 끝은 불안이 아님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그 소문을 듣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는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기에 두려움이 던지는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두려움이 주는 메시지를 읽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으로 나아가라는 표지이며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임이 분명합니다.

이제 나도 헤로데처럼 자신의 의지와 감정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가치기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는지 성찰해봅니다. 술이나 약물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해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으며 더구나 사랑은 찾아들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려거든 현세적인 방편들이나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더욱 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 하루도 지닌 것을 잃어버릴까, 자신을 상실할까,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할까, 더 사랑하지 못할까, 끊임없는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까, 사랑할 기회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거룩한 두려움’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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