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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979aaa] 쪽지 캡슐

2006-09-06 ㅣ No.104058

이상범 칼럼  

제목   <신의 대리자> 피우스 12세의 침묵
글쓴이 관리자 E-mail 번호 41
날짜 2004-05-21 조회수 40 추천수 0




2차 세계대전 때 묻어 두었던 한 지뢰가 터진 것은, 1963년이었다. 베를린의 한 극장에서, 독일의 극작가 롤프 호시후드(Rolf Hochhuth)가 <신의 대리인>(Der Stellvertreter)을 상연한 것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줄거리: ‘유대인 학살을 위한 가스실을 목격한 바 있는 SS장교 게르쉬타인이 젊은 수도사 리카르도와 더불어 나치스의 만행을 교황 피우스 12세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교황은 아무런 행동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절망한 리카르도는 나치스가 유대인을 식별하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가슴에 붙이도록 한 그 “다윗의 별”을 스스로의 가슴에 달고 강제수용소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 작품은 같은 해 런던에서, 이듬해에는 뉴욕에서도 상연된다. 이후 오늘 날까지 적어도 28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가톨릭교회와 나치즘의 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교황 피우스 12세와 제3제국에 관한 비판적인 주제는 찬반의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었다. 한 동안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2002년 그리스 출신의 프랑스 감독 코스타 가브러스의 손으로 영화화되어 논쟁의 불길을 재연시킨 바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영화의 제목이 본 란에서도 이미 다룬 적이 있는 <아멘>이다.
교황 피우스 12세(1876-1958, 재위 1939-1958)는 역대 교황들 중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분으로 추앙받는다. 한국 최초의 주교 노기남은 그에 의해 임명 받았다. 1958년 10월 9일,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세계 각국의 영수들이 다투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영국 수상 맥밀런은 “정신적 존귀를 수호하고, 평화를 위해 위대한 역할을 다한 교황의 죽음으로 세계는 한 단계 더 가난해졌다”했고,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하나님에의 철저한 경건으로 인류를 위해 봉사했다”하고 칭송했다. 이스라엘의 외상 골다 메이어 부인조차도 “세계평화를 위한 위대한 종복의 상실”이라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교황이 눈을 감은 것은 가스테르 간돌프의 여름별장에서였다. 그의 시신이 로마로 이송될 때, 25km에 이르는 연도는 교황의 죽음을 애도하는 무리로 매워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례 대열은 영원의 도성 로마가 일직이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장관을 이루었다. 모든 광경을 TV로 지켜보고 있던 롱가리 추기경(피우스12세를 이어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됨)은 “이만큼 많은 사람의 환영 물결 속에서 로마에 개선한 교황이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인들 있었을까보냐?” 하는 감탄을 수기에 남겼다. 바티칸의 신문은 썼다. “로마 최고의 영웅 G. 율리우스 가에사르의 장례행렬을 능가했다”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한 극작가의 작품이 도화선이 되어 피우스 12세가 묻어두었던 과거의 한 순간을 파헤치고 나섰으니, 잠잠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말하는 교황이 왜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도 없을 범죄의 주범인 히틀러와 나치스의 체제를 묵인하고 그에 동조했을까하는 것이 논의의 중심 테마가 되었다. 그 논의들을 정리하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교황이 지니고 있었던 독일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선호가 작용했을 것이고, 둘째로, 수억의 신도를 거느리는 교황으로서, 조직과 제도의 안위를 염려하는 나머지, 나치와 대립해서 교회가 공격을 받지 않게 하려는 정책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셋째로, 종교를 아편이라 선언하고 교회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신도들을 고문하고 순교케 한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벽으로서의 역할을 나치스에게 기대했을 것이라는 것.
그는 2차대전을 회피하기 위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평화를 호소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가톨릭교회 조직 전체의 안전과 유지를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되는 교황의 자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치에의 비난은 사태를 악화할 뿐이라는 보수적 판단이 양심의 소리를 눌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당시 가톨릭교회 전체가 침묵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황의 침묵과는 대조적으로, 교회의 히에랄키에서는 하위에 속하는 많은 사제와 수도사들이 나치의 범죄에 대해 비난하고 저항했다. 수천의 성직자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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