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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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신부님 살레시오회 :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약함, 결핍, 무력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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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석 [pys2848] 쪽지 캡슐

2022-01-13 ㅣ No.152248

나이를 먹어갈수록 좀 더 자주 드는 느낌이기에, 보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연민(憐憫)입니다. 이웃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슬픔을 함께 공감하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아이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거의 자동으로 연민의 정이 솟구칩니다. 부모가 뒷받침해줘도 살아가기 벅찬 이 세상, 의지 가지 하나 없이 홀로 서려니 얼마나 고생일까? 부모 없다는 이유로 어디선가 혹독한 상처나 차별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한 가지 든 생각. 하느님께서도 나를 바라보실 때 그런 마음이시겠지. 오랜 세월 그토록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나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나, 다양한 결핍과 상처로 허덕이는 나, 과감히 털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함을 머리로서는 잘 알고 있지만,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련한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심정도 연민의 정으로 가득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단어 역시 연민입니다. 중병이 깊어져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만 있는 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연민이 그를 치유와 회복의 현장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의 강한 연민의 시선을 중풍 병자를 향했습니다. 즉시 연민의 시선은 구원의 손길을 불러왔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약함, 결핍, 무력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이 이웃과 하느님으로부터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치유와 회복, 자유와 구원으로 연결되니 말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 진정한 위로와 위안을 받습니까? 감미롭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예쁜 꽃다발? 고급지고 맛있는 간식? 물론 위로가 될 것이겠지만, 지극히 한시적인 위로입니다.

  

가장 큰 위로는 극심한 고통의 순간, 누군가가 내 옆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긴 어둠의 터널 속을 지날 때,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무익한 것처럼 여겨 지지만 함께 괴로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어려운 순간 동고동락한 사람들, 위기의 순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종종 혈육보다 더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깊고 어두컴컴한 인생의 동굴 속에 갇혀있을 때, 기꺼이 그 동굴 속으로 들어와 줌으로써 굳은 결속 의지를 보여주었기에, 혈연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 하느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꽃피는 좋은 시절은 물론 폭풍의 계절에도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혼돈과 방황의 시절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십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힘들면 힘들수록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머릿속에 떠올려야겠습니다. 그분은 어떻게든 우리와 굳게 결속되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기쁨은 물론 슬픔까지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틈만 나면 우리를 보호하고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분이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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