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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말라기 3장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받으려면 (3,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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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마지막 예언서 '말라기서' 입니다. 그 중에서 제 3장 해설편을 올려 봅니다. 참고로 보세요.
말라기 3장 (講解)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받으려면 (3,1-24)
1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 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그 한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 5 나는 너희의 재판관으로 나타나 점장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 하늘 두려운 생각없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6 나는 야훼라, 나는 변하지 않는다. 너희를 여전히 야곱의 후손으로 대접하리라. 7 너희는 조상적부터 내 법규를 저버리고 지키지 않았다. 이제 나에게로 돌아 오너라.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돌아 가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8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느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느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9 이 천벌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10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1 내가 해충을 막아 땅의 소출을 축내지 못하게 하고 포도 농사를 망치는 일도 없게 하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2 너희가 사는 이 땅은 낙원이 되어 뭇 민족이 너희를 부러워하게 되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3 '이 무슨 무엄한 소리냐?' 하고 내가 꾸짖었더니, 너희는 '우리가 주께 무슨 못할 말을 하였습니까?' 하는구나. 그러나 14 너희가 정말로 하는 소리는, '하느님을 섬겨 보아야 쓸데없는 일이다. 그의 분부를 지켜 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만군의 야훼 앞에서 베옷을 입고 울어 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15 결코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 살 길이 트이는 세상인걸. 못된 짓을 해야 성공하는 세상인걸.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16 나를 공경하던 자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 이 야훼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나를 공경하고 내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나는 책에 적어 두고 잊지 않으리라. 17 내가 나서는 그 날에 가서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그런 사람들을 귀엽게 여겨 내 백성으로 삼고, 효도하는 자식처럼 아껴 주리라. 18 그제야 너희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어찌 되는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과 섬기지 않는 사람이 어찌 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될 것이다. 19 보아라, 이제 풀무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다가왔다. 그 날이 오면, 멋대로 살던 사람들은 모두 검불처럼 타 버려 뿌리도 가지도 남지 않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0 그러나 너희는 내 이름 두려운 줄 알고 살았으니, 너희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 주리라. 외양간에 매여 있던 소가 풀려 뛰어 나오듯, 너희는 밖으로 나와 21 나쁜 자들을 짓밟으리라. 내가 나서는 그 날이 오면, 나쁜 자들은 너희 발바닥에 재처럼 짓밟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2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23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24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 2장 마지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 공의가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들에게 어떻게 공의를 세우시는가 말씀하십니다. 또한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가야합니까 묻는 그들에게 하느님께 돌아오는 구체적인 길을 말합니다. 성전을 짓고 제물을 드렸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정성과 믿음으로 드려야합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돌아왔지만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돌아오지 않는 백성을 찾아오셔서 돌아오도록 일하십니다.
“1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야훼께서 당신의 특사(特使)를 보내십니다. 그가 주님의 길을 닦을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내 특사’ 라는 말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언(預言)입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지 않는 백성을 위해서 친히 사자(使者)를 보내십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마음 그릇을 준비시킵니다. ‘ 행차 길을 닦는다’ 함은, 모든 사람들의 심령(心靈)에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로서 회개(悔改)시키는 것입니다. 미리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킵니다. 누구를 만나려면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합니다. 마음을 잘 준비해서 하느님을 만나야 바르게 만나고 바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미사)에 나오는 것도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 전에 와서 준비하고 드려야 큰 은혜가 됩니다. 마음과 정성과 사랑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율법적인 준비를 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세례자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닿았다’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율법으로 나를 살펴보아야합니다. 나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철저한 자기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야합니다. 그 후에 은혜의 세계가 열립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심판해야 하느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마음에 고속도로를 만들어야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바로 그 마음에 오십니다. 그 후에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주님이,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입니다.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주(主)’ 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때에 곧, 메시야를 대망할 줄 모르고 있던 때에 그가 홀연히 오셔서 그가 오신 일이 뜻밖의 일이 됩니다. 메시야의 사역(使役)은 영적으로 성전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일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성전에 임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성전에 오시고 친히 성전이 되십니다. 야훼! 만군의 주가 말합니다. ‘계약의 사자’ 라는 뜻은,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구원 언약을 성취하시는 중보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말라기는 세례자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 2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 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예수님은 먼저 오셔서 정결(淨潔)케 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르는 날에, 아무도 예수님을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받기 전의 인간 그대로는 그리스도 앞에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별 수 없이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악에 대하여 무관심하신 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의 권위를 가지시고 사람들을 불러 회개(悔改)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주시는 구원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멸망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가 나타나는 때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금과 은을 단련(鍛鍊)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漂白)하는 잿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금을 제련(製鍊)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이 우리를 정화(淨化)하십니다. 빨래를 깨끗하게 빠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정화 운동은, 십자가(十字架)에서 자신이 심판을 받으심으로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여러 고난을 주셔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 때에 정화하는 이 일은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재림 때에 완전히 정화하는 날까지를 포함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드려야합니다.
“ 3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그 한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 ”
야훼께서는 레위자손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야훼께서는, 은(銀)을 정련(精鍊)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야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가장 최상의 제물로 하느님께 드릴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는 절뚝거리는 것, 도둑질한 것을 드리지 않습니다. 여기 레위 자손은 제사장들을 말하는 것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일반 성도(聖徒)를 총칭합니다. 예수를 영접(迎接)한 자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信者)들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니심으로 속죄를 통하여 깨끗게 하십니다.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시키는 운동을 통하여 신자를 깨끗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환난을 방편으로 하여 사랑하는 자를 단련하십니다. 하느님은 바벨론에 포로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을 단련하셨고 폐르시아나 그리스 로마를 통해서 단련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여러 시련(試鍊)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하십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죄(罪)를 철저히 다루셨습니다.
요즘도 우리나라 교회의 지도자가 부패되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량주의 성적인 부패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영적인 지도자들을 불신자들의 비난과 사법부의 심판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화되어가는 성도(聖徒)들이 하느님을 참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의로운 제물을 야훼께 드린다는 것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야훼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정성과 사랑으로 봉헌금과 예물을 드려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야훼께 기쁘게 할 것입니다.
“ 5 나는 너희의 재판관으로 나타나 점장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 하늘 두려운 생각없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여기서부터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재림하셔서 공의를 회복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회개하는 자들이 있지만 회개치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날에 회개치 않는 그들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일꾼의 품삯을 떼어 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주님은 야훼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심판의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십니다. 술수하는 자는 거짓된 종교적 수단에 의하여 사람을 하느님에게서 떠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일계명을 어기는 자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거짓 맹세하는 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자신을 포장하는 자입니다.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함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하느님께 드릴 것이나 남의 사유재산에 피해를 주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은 창녀들이 번 돈을 헌금으로 드리면 받지 않으십니다. 품꾼의 삯을 주지 않고 그 돈으로 헌금하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을케함은, 무자비한 자이니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과부, 고아, 외국에서 온 나그네 이 셋은 성경에서 흔히 함께 나타납니다. 그들은 다 자비로움의 대상입니다.
나를 경외(敬畏)치 아니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 부분에 기록된 죄악의 목록에 있어서 최후로 나옵니다. 하느님을 공경(恭敬)하지 않는 것이 모든 죄악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경외치 않음으로 다른 죄를 짓게 됩니다. 모든 죄악의 근본인 경외심 없음을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하여 도리어 그것을 중요한 죄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매(愚昧)한 자들에게는 돌연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연히 재림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계속하여 유대 민족의 정화 운동에 대하여 진술합니다. 이 정화 운동은 위에 말한 것(3절)과 같이 제사장에게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임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기탄없이 범하는 자들에게 임하여 의와 불의를 갈라놓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셔서는 이런 죄를 위해서 예수님 스스로 심판을 받아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고 하느님께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예수님이 재림 시에 친히 심판하십니다.
“ 6 나는 야훼라, 나는 변하지 않는다. 너희를 여전히 야곱의 후손으로 대접하리라. ”
야훼께서는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야곱의 자손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말라기는 정화의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하신 것을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내시어,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 ‘여전히 야곱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 중에 있었던 교회를 가리킵니다. 거기에 더하여 연속된 새 이스라엘 곧, 이방인 교회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보혈을 영접(迎接)한 자들을 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 때도 이스라엘을 소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우상숭배를 했지만 그들을 없애지 않고 그들을 바벨론에 보내서 단련하십니다.
“ 7 너희는 조상적부터 내 법규를 저버리고 지키지 않았다. 이제 나에게로 돌아 오너라.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돌아 가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정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실 때 그들이 정의를 버린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때로부터, 그들은 야훼의 법규(法規)를 떠나서 지키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하느님은 이제 너희는 야훼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면 야훼께서도 그들에게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다. 야훼께서 공의를 회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또 다시 하느님께서 유대인들의 회개치 않음을 통탄(痛嘆)하십니다. 그들의 범죄 생활의 역사는 오래였고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로 돌아 오너라.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는 말씀은, 회개의 은혜로운 성격을 보여줍니다(1,3). 사람이 회개할 마음을 진실히 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면, 하느님이 그들의 회개를 받아주십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무한히 먼 거리를 가는 것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그 회개한 자에게로 돌아오시니, 먼 거리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복음적 은혜입니다. 이렇게 복음적 은혜인 회개(悔改)를 유대인들에게 요구하였으나 저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려면,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돌아 가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죄에 대해서 무지(無知)하였습니다.
“ 8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느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느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9 이 천벌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
사람이 사람을 속여서도 안 되지만 하느님의 것을 속이면 더욱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을 속이고도 '사람이 하느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느님을 속이겠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회개(悔改)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것이 속이는(도둑질)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리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야곱도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도 십일조에 대해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의(義)와 공의(公義)와 사랑을 갖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태23,23)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느님의 것을 훔치니, 그들 모두가 저주를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소출(所出)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실상 은혜입니다. 그 소출을 주신 이가 야훼 하느님이시니 그것을 그가 전부 요구하셔도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고 다만 십분지 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역대기상 29장 14절에서 우리의 받은 것을 하느님께 드린 것이라고 합니다. 십일조는 하느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순간 내 소유가 하느님의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열에 하나는 내게 주고 나머지는 네가 가지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십일조를 내서 레위 족속의 사용할 것을 공급하시게 하셨습니다. 곡식, 술, 기름 양떼와 소떼의 처음난 것 등에 대한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레위27,30 민수18,20-24 신명14,22). 십일조는 하느님께 속(屬)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는,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느님의 것을 도적(盜賊)질하는 것과 같은 죄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드리지 않고 쓸 때 그 돈은 헤어진 전대처럼 새어나가게 됩니다. 십일조를 내면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내 일이 잘되면 하느님께 많은 십일조를 드릴 수 있으니 내 일을 잘 되게 해달라는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 우리는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 “ 10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이스라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별하여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최상의 것을 드리듯이 하느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절름바리나 눈먼 것이나 병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것을 드리지 말아야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구별하여 드려야합니다.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드려야합니다.
여기 ‘곳간’이라고 한 것은 성전 창고를 말하는 것입니다(느혜10,38, 13,12 역대하 31,11). 온 교인이 십일조를 하면 성전창고가 넘치게 됩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합니다. 그러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울 수 있습니다. 직접 가난한 자를 돕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 쉽습니다. 교회 이름으로 돕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나의 이름을 빼야 합니다. 내 이름석자를 써서 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됩니다.
“두고 보아라”는 말씀은, 그가 확실히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주실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시험(試驗)하라고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바치는 일로 야훼를 시험하여, 야훼께서 하늘 문을 열고서, 그들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하였어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복을 주시지 못하였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옵니다. 하느님이 문을 열어야 복을 주십니다.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시험(試驗)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것은 믿음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도 바치지 않으니 시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험하라는 것은 순종을 통하여 체험해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조금 미련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 11 내가 해충을 막아 땅의 소출을 축내지 못하게 하고 포도 농사를 망치는 일도 없게 하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2 너희가 사는 이 땅은 낙원이 되어 뭇 민족이 너희를 부러워하게 되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야훼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福)주실 것인가 말씀하십니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땅의 소출(所出)을 해로운 벌레가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포도밭의 열매가 채 익기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땅이 이처럼 비옥하여지므로,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복되다고 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 주실 것을 여러 가지로 진술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 중에 확실히 이 말씀대로 하느님의 갚아주시는 풍성한 물질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때 우리가 온전힌 십일조를 드렸나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십일조는 바치지만 다른 죄악 때문에 물질적 축복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바치되 게으르고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福)주시는 것을 체험해야합니다.
“ 13 '이 무슨 무엄한 소리냐?' 하고 내가 꾸짖었더니, 너희는 '우리가 주께 무슨 못할 말을 하였습니까?' 하는구나. 그러나”
말라기는 7가지의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대적합니다. 바보들은 '우리가 주께 무슨 못할 말을 하였습니까?' 바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최소한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바보들은 자신이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잘나고 세상 사람들은 다 못났습니다. 이것이 바보의 정체의식입니다. 우리는 다 몰라도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운동을 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알아야합니다. 형편없이 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만(驕慢)합니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선이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지난날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보면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바보였습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 더 잘 해주었어야하는데 잘못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밥 먹이고 학비만 주었다고 다 해준 것은 아닙니다.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고스톱 칩니다. 놀러가면서 시장 간다고 거짓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대적합니다. 이스라엘이 불손한 말로 야훼를 거역하였습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께 무슨 못할 말을 하였습니까?' 하고 이스라엘은 묻는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남에게는 복을 주시고 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대듭니다. 하느님의 공의에 대해서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복을 주신 것은 물질만 가지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당대에만 평가하지 못합니다. 후대에 평가해야합니다. 하느님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지적합니다. 저들이 하느님을 대적하고, 여기서도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눈먼 것을 드리고 하느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모든 원망은 하느님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키가 작으냐고 원망합니다. 왜 이렇게 낳았느냐고 하는 것도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적절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입니다. 그들은 누가 감히 하느님을 대적하느냐고 말하지만 그들이 원망한 것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욥도 왜 나를 태어나게 하였느냐고 원망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처지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은총(恩寵)임을 알아야합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많은 은혜(恩惠)를 주셨느냐고 과분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예언자 말라기의 예언에 있어서 그 특징은,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한 점입니다.
“14 너희가 정말로 하는 소리는, '하느님을 섬겨 보아야 쓸데없는 일이다. 그의 분부를 지켜 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만군의 야훼 앞에서 베옷을 입고 울어 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
이스라엘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하느님을 섬겨 보아야 쓸데없는 일이다. 그의 분부를 지켜 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만군의 야훼 앞에서 베옷을 입고 울어 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고 합니다. 그들이 야훼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원망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단식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그가 갚아주시는 일이 없다고 패역하게 주장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억지로 지킵니다. 마음 없이 지킵니다. 축복을 목적으로 하여 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지켜야 합니다. 기쁨으로 드려야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유익하느냐고 유익만을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드려도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 드리고 장사 안 된다고 십일조를 돌려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돈을 꾸어서 드렸는데 장사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자가 십일조를 낸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유익(有益)에 초첨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를 바쳤으면 하느님이 이미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복을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기다려야합니다.
“15 결코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 살 길이 트이는 세상인걸. 못된 짓을 해야 성공하는 세상인걸.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그들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느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災殃)을 면한다! 고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잘 살드만’ 하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들이 잘 산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잘된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는 자가 악을 행하면서 ‘하느님이 심판하시는가 보자’하며 의심하지만 이런 자가 화를 면한다는 주장합니다.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불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사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불신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어설프게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이 말로는 이런 죄악된 사상을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속에 이런 죄악된 사상을 품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행동 면에 있어서 자기들도 모르는 가운데 이런 죄악된 사상을 행위로 그려 놓는 일이 있을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런 위험을 경계하고 언제나 생각과 언행에 있어서 하느님의 진리에 붙들어야 합니다.
“16 나를 공경하던 자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 이 야훼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나를 공경하고 내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나는 책에 적어 두고 잊지 않으리라. ”
우리는 위의 13-15절에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예언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합니다. 그 때에 주께서는, 주를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습니다. 주를 공경하는 자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만 하였습니다. 이들의 담화 내용이 냐훼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반대로, 하느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 벌을 주신다는(18절) 담화(談話)일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공경하는 자들은 관점이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마치 갈랩과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욥은 믿음의 말을 하고 욥의 아내는 불신의 말, 불평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야훼를 공경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책(비망록)에 기록하셨습니다. 야훼께서 ‘책에 적어 두고 잊지 않으리라’ 합니다. 그들을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하여주십니다. 그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기 이전에 하느님은 그들의 영혼을 먼저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중세기 수도사가 길을 가는데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습니다. 농부가 파 마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수도사가 뭐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농부는 노는 사람이 뭐달라고 하느냐고 마른 마늘 봉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 천국 창고에 가니 마늘 봉지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은 다 그대로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 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입니다.
“17 내가 나서는 그 날에 가서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그런 사람들을 귀엽게 여겨 내 백성으로 삼고, 효도하는 자식처럼 아껴 주리라. “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야훼께서 지정한 날에, 이스라엘은 야훼의 특별한 소유가 됩니다. 부모가 효도하는 자식을 아끼듯이, 야훼께서 그들을 아끼십니다. 하느님은 공경하는 자들을 vip로 대접하십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날이 있습니다. 그날에 하느님은 복을 주십니다.
잠언에 ‘의인의 자식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선하게 사는 사람의 후손은 존경받으며 살게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설프게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야훼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그날에 하느님이 그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18 그제야 너희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어찌 되는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과 섬기지 않는 사람이 어찌 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될 것이다. ”
하느님은 다시 돌아와서 그 때에야 이스라엘이 다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비로소 분별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멸시하는 자와 공경하는 자를 분별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와 십일조를 내는 자를 분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느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입니다. ‘그제서야’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때는 양과 염소를 나누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와 공경심이 없는 자를 구별합니다. 양과 염소를 분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판단 기준으로 살아야합니다.
요절(要節)은 3장 10절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스라엘은 예언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현실의 장벽을 넘어 멀리 있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19-24절 말씀에는 세상 끝에 이루어질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극렬한 불로 심판할 때 오직 야훼를 공경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치료하는 빛(광선)을 비추어서 구원하십니다.
"19 보아라, 이제 풀무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다가왔다. 그 날이 오면, 멋대로 살던 사람들은 모두 검불처럼 타 버려 뿌리도 가지도 남지 않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풀무(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옵니다. 용광로의 불은 심판의 불입니다. 하느님은 용광로 불로 심판하십니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보아라, 이제 풀무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에는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초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야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오신 시대 곧, 신약 시대를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 시대는 은혜로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를 어떻게 "풀무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 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편에서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들어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극렬히 타는 십자가 풀무에서 심판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심판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때로는 지금도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을 불로 심판하십니다. 원자력이나 수소폭탄과 같은 빛이 와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일본에 있습니다. 사십만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있던 자리만 있고 사람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심판하실 때도 불로 심판하십니다. 뿌리까지 태우십니다. 영원히 고통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 빛이 치료하는 광선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한 두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습니다.(루가2,34). 그리스도의 복음은,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향기의 구실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후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합니다. 내 대신 심판 받은 것을 영접(迎接)하면 구원을 받고 영접지 않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멸망당할 자들에 대하여는 신약 시대도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입니다. 이 때에 교만하여 복음을 받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 다 초개와 같이 불타서 망하듯이 멸망을 당합니다.
" 20 그러나 너희는 내 이름 두려운 줄 알고 살았으니, 너희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 주리라. 외양간에 매여 있던 소가 풀려 뛰어 나오듯, 너희는 밖으로 나와
공의로운 해는 치료의 빛입니다. 야훼의 이름을 공경하는 자들에게는, “너희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승리의 해는 의(義)를 가져다주는 해입니다. 사람들은 풀뿌리나 약을 통해서 치료합니다. 하느님은 빛으로 치료합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극렬한 불로 태울 때 모든 것은 타버립니다. 한편으로는 빛은 치료하여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날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두려운 줄 알고 "라는 말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신앙을 공경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가리킵니다(루가1,78). 시편 84,11 60,19 참조.) 태양이 만물을 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赦)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생명력으로 우리를 치료하여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라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 "치료하는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치료"라는 말은 구원을 가리킵니다(예제47,12). "외양간에 매여 있던 소가 풀려 뛰어 나오듯, 뛰리라"는 말씀은, 신자들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극도로 기뻐할 것을 비유합니다. 밤새 외양간에 있던 소를 내놓으면 자유를 얻고 껑충껑충 뛸 것입니다. 외양간은 죄로 인하여 가두어 놓은 세계입니다. 온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마리아 지방에 가서 뛰어다니면 복음을 전합니다.
"21 나쁜 자들을 짓밟으리라. 내가 나서는 그 날이 오면, 나쁜 자들은 너희 발바닥에 재처럼 짓밟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야훼께서 이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그들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악인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쁜 자들(악인)을 짓밟으리라“ 함은, 구원 얻은 하느님 백성의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날 악인이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재와 같이 없어지는 것을 봅니다. 악한 자는 불로 심판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는 치료하는 빛으로 소생(蘇生)합니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 재림 이전 시대에 완전히 실현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친히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때에 완전히 실현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 승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물론 이 승리가 복음 운동 시대 곧, 신약에도 겨자씨와 같은 씨앗으로 존재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22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
하느님을 공경(恭敬)하는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敬畏)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야훼께서 호렙 산에서 야훼의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언자 말라기가, 유대인들더러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합니다. 그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심히 부패하여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는 그는,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로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두려움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에 세례자 요한(엘리야 5절)이 오신 목적도 회개하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3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이 이르기 전에, 야훼께서 그들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야훼께서 나타날 그 무서운 날"은,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언자 엘리야" 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이유는, 두 사람의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루가1,17).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치료하는 빛으로 오시지만 그 전에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가 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세레자 요한을 메시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야가 아니라 엘리야라고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이 치료의 빛을 맞이하도록 돕습니다.
“24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엘리야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야합니다. 돌이키는 것의 반대는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마음이 서로 먼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집에 오랜만에 갔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느냐 물으니 아버지는 알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보아도 이해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멀어진 것입니다. 마음이 가까워지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와서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합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 바로 효(孝)를 회복하고 자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공경하고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이키지 아니하면, 야훼께서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족끼리 마음을 열어야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이 마음을 열게 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동숙(同宿)자는 있어도 가족은 없다고 합니다. 같이 살면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독이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 문을 닫았습니다. 엘리야는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돌이킵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이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나 환경으로 마음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좋은 집보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하나가 됩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는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가족은 마음이 멀어집니다.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통합니다. 다 신앙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면 마음이 통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유대인은 이방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복음으로 이방과 유대인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끼리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미국에는 국회 안에 기도실이 있고 예배당이 있습니다. 국회할 때는 싸웁니다. 그러나 예배드릴 때는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여야가 다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신앙 안에서 마음의 거리를 좁혀야합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독이 없고 한숨이 없고 위로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도록 하면 효자(孝子)가 됩니다. 훌륭한 부모가 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회개시킵니다. 도덕적 개혁이 예수님을 믿게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는 시킬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맞이(迎接)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루가3,4-6)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고 행하는 신앙은 잘못된길로 갈수있습니다. 심판의 하느님이시지만 사랑을 위한 심판임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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