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0일 (토)
(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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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활 제3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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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2-05-06 ㅣ No.154909

1독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31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지리적 순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팔레스티나의 지리를 보면 유다가 제일 남부에 위치하고, 사마리아가 중앙에, 그 다음 갈릴래아가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대목에서 루카는 유일하게 갈릴래아에도 교회가 건설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순서는 루카의 신학적 구도에 따른 순서다. 루카의 선교 구도는 먼저 유다인들이 사는 유다와 갈릴래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다음 유다인들의 이방인들 사이에 위치한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거쳐 이방인들의 영역에로 확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팔레스티나의 공동체가 누리는 평화는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기쁜 소식과 연결된 평화의 개념이다.

 

32

루카는 베드로를 이미 여러 교회를 방문했고 지도하는 선교 책임을 맡은 중요한 인물로 그린다. 리따는 예루살렘과 요빠 사이에 있는 유다의 한 음으로서 지방관청이 있는 곳이었다.

 

35

사론은 요빠와 가이사리아 사이의 해변 평야지대다. 리따라는 도시에서의 지엽적인 선교로 확대묘사된다. 루카가 애용하는 문학기법이다.

 

36

그리스어로 도르가라고 번역되는 타비타는 아람어로 영양을 말한다. 여기서에서 영양은 사랑스런 이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선행은 자선을 포함한다. 자선은 유다교에서 매우 중시하는 덕이다.

 

38

여기서 그 무렵이란 베드로가 리따를 방문하던 시기를 말한다. 시체를 씻기는 것은 장례식의 한 절차다. 다락방에 시채를 눕혔다는 보고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락방에 올려 놓았다는 이야기를 반영한다.

 

38

둘을 파견하는 초대 공동체의 관습에 대해서는 3.1;8.14;13.2를 보라.

 

39

이 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더 중대한 사건을 위해 고르넬리오에게서 파견된 사람들을 즉시 따라나선다는 10.23의 내용을 미리 준비한다.

 

40

일너나다는 루카가 예수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도르가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께서 소녀를 살리신 복음서의 이야기와 유사점이 많다. 심부름꾼들의 파견, 주위 사람들의 애곡, 방안에서 외부인들을 내보냄. 일어나라는 명령. 손을 잡고 일으킴 등.

 

42

애네아를 치유한 경우처럼 놀라운 사건을 목적한 사람들은 베드로가 아니라 주님을 믿게 된다. 그들이 목격한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0-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60

앞서 언급된 제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제자들로서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도 유다인들처럼 알아듣기 어렵다고 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말과 함께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도 유다인들처럼 알아듣기 어럽다고 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61

예수의 계시 말씀이 믿기 어려울 만큼 마음에 걸리는지 묻는다. 예수의 계시 말씀은 믿는 자에게는 오히려 믿음을 굳게 해주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큰 당혹에 빠지게 한다.

 

62

문맥상 하늘에서 내려오다에 상응한다. “전에 있던 곳은 곧 하늘을 가리킨다. , “사람의 아들의 고향은 하늘이고, “사람의 아들은 그곳으로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이 시사된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원문에는 없지만 문맥상 이런 질문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인격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의 아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믿는 사람은 예수의 말에 걸려넘어지지않는다.

예수의 참된 신원을 알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의 아들이 들어높여져 영광스럽게 된다면 비로소 예수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더욱 견고케 되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더욱 불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63

은 생명을 줄 수 있으나 은 그렇지 못함을 강조한다. 을 강조하기 위해 이 상대적으로 언급된다. 한마디로 은 생명을 주는 데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62절을 두고서 언급된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의 아들은 생명의 영과 약속된 생명의 선물 및 성체성사의 선물도 주는 권능을 가지게 되지만 의 차원, 곧 지상적 지위에서 예쑤는 자신이 말한 그 모든 것을 다 이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소용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 자신의 은 오히려 육화에서부터 십자가상 죽음의 헌신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상적인 영역과 천상적인 영역을 대조하기 위해 이 언급된 대목도 예수의 이런 지상적 지위와 천상적 지위를 비교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이 대목은 예수 자신이 천상적 사람의 아들로서 생명을 준다는 데 역점을 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은 63ㄷ절에 직결된 말이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말들은 제자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생각한 예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가리킨다. 즉 그 말씀은 오히려 영이며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는 시몬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도 고백한다. 그러나 생명이란 개념을 고려한다면 이 구절은 또한 63ㄱ절과도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은 영과 생명을 지닌 영적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육적 말씀, 곧 인간적 말씀오로만

 

받아들이고 육적 말씀, 곧 인간적 말씀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믿음으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임은 예수의 약속을 전제한다. 아버지로부터 연유된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믿는 이들이 예수의 말씀안에 머물고 그 말씀을 보존하여 그 말씀의 진리로 더욱더 깊게 인도되어야 한다.

 

64

영이며 생명인 예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제자들 곧 예수의 말씀에 걸려넘어진 제자들도 있다는 사실이 예수의 입으로 증언된다. 문맥상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재차 촉구한다. 이 촉구에도 불구하고 계속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불신 때문이며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맥상 제자들이 예수를 배신하고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리라는 말도 관련된다.

 

65

64ㄱ절에 연결된다. 인용된 예수의 계시 말씀은 내용상 44절과 가장 가깝다. 하느님의 은총으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어 있다.

 

66

이 때문에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번역은 66절을 65절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다.

예수가 예시한 말이 이제 실제로 이루어진다. 이 사건은 예수가 열두 제자의 믿음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계기가 된다. 예수 곁을 떠난 다른 제자들은 어둠 속을 거니는 자들로서 이제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때부터라 번역도 가능하다.

 

67

제자들이 예수 곁을 떠나간 상황에서 특히 열두 제자에게만 제기된 물음이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는 진지한 물음으로서 함구한 믿음의 격려도 내포되어 있다.

 

68

베드로가 열두 제자 대표자로 시사되는 대목은 요한복음에 더러 있다.

 

예수만이 열두 제자에게 삶의 질과 영향을 제시한다는 뜻으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믿는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63ㄴ 절의 내용을 이제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이다. 열두 제자는 예수의 말씀이 어려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예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영역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의 자세다.

 

69

예수에 대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적 칭호는 공관복음에서도 저자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르다. “그리스도”,“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하느님의 그리스도그러나 예수의 메시아성을 말하는 데는 일치한다. 예수의 메시아적 칭호는 각 복음서의 깊은 신학적 이해 가운데서 사용된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도 예수의 메시아성을 가리키는 칭호로서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백약식은 우선 예수의 자기계시 양식,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 자기계시에 따른 예수의 신적 계시 나요또는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에 상용한 것으로서 예수

 

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란 말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서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의미는 10.36에서 더욱 명확하게 설명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을 때 아들을 거룩하게하셨고, 파견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칭해진다. 그러므로 시몬 베드로의 이 메시아 고백은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학적 해설이 가미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부 사본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분대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되어 있다.

 

믿고 안다란 이중적 표현은 신앙고백 내용이 일치됨을 강조한다. 특히 안다란 표현은 인격적 결속관계를 시사하고 믿음의 내적 확신을 강조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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