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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에서 꽂힌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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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22-11-12 ㅣ No.226374

오늘 미사에서 꽂힌 말씀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1112)

 

“Verumtamen Filius hominis veniens, putas, inveniet fidem in terra? · 그런데 인자(人子)가 오면서 세상에서 믿음을 발견할 거라고 과연 너는 생각하느냐?”(루카 18,8)

 

우리가 오늘 봉독하는 루카 복음의 단락(18,1-8)은 지난 연중 제29주일(1016)에 봉독했는데, 오늘 평일 미사에 다시 읽는다. 이 단락은 루카 복음서에만 수록된 특수사료(2-8)인데, 그중에 1절과 8절의 마지막 문장은 루카 복음의 편집자가 붙인 말이다. 이렇게 특수사료에다가 편집자가 가필한 부분 즉 1절과 8절 마지막 문장의 의도를 보면, 오늘 말씀(2-8)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을 할 수 있다. . “예수님의 제자라면 끊임없이 기도하여 종말의 순간까지 그 기도로써 신앙을 증거 하라는 말씀이다.

오늘 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성가실 정도로 간청을 멈추지 않았다는 이야기(루카 18,2-5)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다. 이 이야기에서 과부와 재판관이라는 두 인물을 대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과부는 힘(권력)도 없고 돈(재물)도 없고 언변(지식)도 없고 후견인(속된 말로 ’)도 없고 세상에서 더 바랄 것(희망)도 없고, 다만 남은 게 있다면 혹시 아들 하나에 삶을 의지하는 늙은 여인인데, 혹 그 아들과 관련한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재판관이란 어떤 인물인가?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율법 교사가 재판관 행세를 했다. 율법주의로 유다교 내의 실세로 행세하면서 백성의 실생활을 규제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시각에서 평가하자면, “그런 자는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고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자(Judex quidam, qui Deum non timebat, et hominem non reverebatur)였다.”(루카 18,2), 그런 재판관은 스스로 나는 하느님 두렵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라면서, 끈질기게 외쳐대는 과부에 대해서 성가시게 구는구나.”하고 말한다. 그래서 결국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준다(루카 18,4-5).

그 성가신 과부(vidua molesta)와 불의한 재판관(judex iniquitatis)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 그리했거늘, 하물며 하느님 당신께서 선발하신 사람들이 외친다면(electorum suorum clamantium) 그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겠는가?”(루카 18,6-7). 하느님께서는 머뭇거리시지 않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신다(루카 18,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다가 루카 복음의 편집자는 인자(人子)가 오면서 세상에서 믿음을 발견할 건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붙이신 것처럼 토를 달았다(루카 18,8 참조). 이렇게 오늘의 복음에서 저자는 종말을 예견하는 생각을 이어준다.

종말을 말할 때 인자(人子)의 재림으로 묵시문학에서 표현한다. 사람의 아들(人子)이 오실 때즉 종말에 배교자들은 어찌 될 것인가? 종말이 도래하기에 앞서 믿음을 저버리는 배교(背敎)의 사태가 일어나리라고 묵시문학은 예측한다(정양모 역주, 루가복음서, 1983 분도출판사, 167-168쪽 참조). 이러한 묵시문학적 표현을 빌린 루카 복음의 저자가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 끝에 자기 자신의 생각을 예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필해 놓았다. 루카 복음의 이러한 의도는 이 성경을 읽어야 할 당시의 신자들이 지속되는 박해 속에서 종말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 종말 도래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으므로 실망스러워하지만, 그렇더라도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기도해야만(루카 18,1)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강조를 하는 것이다. , 종말에 오실 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한 기도, 즉 끊임없는 기도란 믿음의 고백이다. 그러한 기도를 중단하면 혹 종말의 도래 전에 믿음을 저버린 배교자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다. 묵시문학이 예측한 바대로 종말이 도래하기에 앞서 배교(背敎)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그에 휩쓸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종말 현상을 우리의 시대에도 체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코로나19와 같은 전 세계적 질병의 만연(팬데믹) 사태는 그로써 신앙의 모임이 심하게 흔들리고, 이어서 믿는 이들의 안이함과 나태가 몸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믿음을 소홀히 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지 우려하는 목소리를 교회 내부에서 듣곤 했는데, 종말의 도래 전에 벌어지는 배교(背敎)의 사태가 아닌지 하는 섬뜩한 느낌도 든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우리는 더욱 끊임없는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오늘은 17세기에 우크라이나 지방의 교구장 주교였던 성 요사팟(Josaphat) 순교자 기념일이다. 요사팟 주교는 가톨릭과 일치하는 우크라이나의 동방교회(Orthodox) 주교였고, 그의 이런 교회 일치 노선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서 살해당하였다.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노풀(현 이스탄불)을 본산으로 하는데 비잔틴(동 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한 후에 우크라이나의 키에프로 일시 본산이 이동되었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자 후에 러시아의 모스크바로 옮겨간 러시아계 정교회가 스스로 정교회의 정통성을 수호한다고 자부하여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좌를 제4의 로마라고 말할 정도였다. 서로마의 멸망 후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제국의 중심이라 하여 제2의 로마로 자처하던 총대주교좌가 동로마의 멸망 후 제3의 로마라고 자처하던 키에프로, 그리고 제4의 로마라고 자처하는 모스크바로 동방 정교회의 중심이 옮겨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미묘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모스크바와 키에프 사이에도 총대주교의 권위에 대한 상호 갈등이 이어져 왔는데 17세기에 우크라이나 지역의 동방교회 중 로마의 가톨릭과 일치하고자 하는 요사팟 주교가 그 반대파 세력으로부터 살해당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스스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처하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지지하였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총대주교좌를 백안시하는 의도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교는 대통령의 복사服事가 아니다라고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향하여 일갈하였다. 역사를 통하여 황제와 국가 권력에 예속되어온 동방교회의 실상을 짚어준 프란치스코 교황의 따끔한 충고였고 또한 더욱 전쟁의 명분에 편승할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렇듯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 동방교회의 입지와는 달리 가톨릭과 일치하고자 노력했던 요사팟 주교의 순교 사실을 기억하는 오늘 착잡한 마음으로 그 지역 전쟁에 대한 우울한 생각이 겹친다. 전쟁이라는 것은 또한 종말의 징후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쟁상황에 신앙인들이 연루된다는 것 자체가 종말의 도래 전에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닐른지! 오늘 루카가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가필하여 전하는 마지막 구절이 가슴에 아프게 와닿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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