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2일 (토)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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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너머의 의미 II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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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6-20 ㅣ No.231851

모순의 패턴

아직 프로이트나 융을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관심사와 연구들이 세계인식의 한 쟝르가 되고 학문적 갈래로 이루어지기까지 이들이 취한 객관성 확보의 방식은 크게 직접적인 상담과 이를 토대로 한 정보들의 축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많은 이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고 세계인식의 한 가지로 공유되는 차원으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인격적인 상호간의 약속, 상호간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협의, 상호간의 방식과 절차에 대한 합의 등 그들만의 아이디어와 생각으로만 그 합리를 주장하는 단계를 넘어 어떤 정보의 축적과 그 기록의 합산을 일구어 냈던 것이다
서구 문명의 과학과 산업의 발전의 근간에 있는 그러한 사실성에 대한 증거의 확보와 증명의 확립이 그렇게 그들에게도 수용되어야 할, 그들도 수용해야 할 관심과 연구의 입장과 태도였고, 그러한 관점이 수립되어야 할 이유였다
서구문명이 그렇게 보다 합리에 증거와 증명의 차원을 확립해 나갈 때, 동양문화권에 있는 지역들은 여전히 그 모든 것들이 무시되는 차원이 더욱 암약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고, 대부분이 모르는 세계성에 대한 메신저나 안내자, 인도자들에 대한 기대와 바램이 그런 비밀스런 밀폐공간을 사회에 더욱 가중시키고 있던 게 또한 사실이었다
동양에는 중국문화권에서 발발한 도교나 유교, 중국식의 불교를 통칭하는 유불선과 고대문명으로부터 있어 온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 그런 무속 신앙?과 같은 토속종교들이 더욱 활개를 치고 있는데, 그것은 상호 간의 합리적인  입장이나 태도, 이를 토대로 한 인격적인 상호간의 대화나 상담, 약속이나 방식을 철저히 배제하고 비밀스런 밀폐공간의 주관자나 주최자를 따르는 방식과 그러한 지배적인 영향력에 복종하도록 하는 일방적인 통로만이 언제나 강조되고 강화되어 매사에 모든 일처리가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처한 지금의 상황도 그런 양상의 전개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국 쪽에서도 어떤 부류들이 그렇게 접근하고 침해하고 실험하는 식의 오만불손함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들의 면면들이 대체로 인도나 남미 계열의 인종들이라는 데에는 사뭇 남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보통의 사실들
대부분의 사실들은 오감을 통한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차원에 머무른다
사물들을 구별하고 인식과 이해 차원에서 분별하도록 하는 것은 인간지성의 본성에 가까운 역할이자 기능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갓 태어난 강아지가 포식자인 호랑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동물에게도 불가능한 본능인 것이다
역시나 동물들도 경험을 통해 천적과 같은 사물들이 생존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것이다
포식자의 이미지가 쉽게 그려지는 것은 자연자체의 본능들이 자신의 생존수단으로 주어진 무기와도 같은 강렬한 인상들 때문이다
사나운 눈빛, 날카로운 송곳니들, 상대를 겁주는 포효, 발속에 박힌 낫 같은 발톱들, 먹이들을 으스러뜨리는 턱과 악력, 소도 거꾸러뜨리는 앞발들의 파괴력 등 한 번 경험해 보면 그 이미지가 뚜렷이 남을 것들이다
인간세계의 모든 사실들도 대부분은 그런 범주의 이미지 인식과 이해의 차원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상당한 거짓과 눈속임이 있고 예의 속임수와 트릭이 섞여 있으며, 긴가민가 하는 모호함과 앞뒤가 안 맞는 모순도 버무려져 있지만, 인간들이 지성적으로 그 모든 사실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자기것을 걸고 자기것을 내어주고 자기것을 다하는 성의와 노력을 보이는 확신을 가지는 데에는 그런 경험적 표상과 산출이 대체로 그 근거로 깔려 있기도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때도 말이다
쉽게 말해 왜 무당의 말을 믿을까
인간이 자기 삶의 경험에 놓인 사실들에 대한 무당의 해석과 대책을 믿고 따르는 데에는 무엇보다 그 사실들에 대한 기대심리, 기복신앙과 같은 의식적인 방향이 경험으로 산출되어야 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렇게 경험적 표상으로 확신하게 되면 재차, 또는 자기 삶의 모든 사실들에 대해 자문과 의뢰를 종속적으로 무당에게 걸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그런 방향으로 자리잡게 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세계성 속에 머물게 되는 혼돈의 차원에 있게 되지만 자기 삶의 사실들이 나쁘게 변질되지 않는 한, 자기 삶의 이익들이 배반되지 않고 증진하며 현상유지가 가능한 한 그것은 자기자신에게도 이로운 방면에 서게 되는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무당의 영역은 사물들의 세게에 국한하지는 않는다
무당들이 모신다는 각 신들은 대부분 대체로 과거의 인물이었던 인간들이다
쉽게 말해 조상신 같은 개념들이다
쉽게 말해 귀신들인 것이다
인간들이 언제부터 그런 존재들을 가정하고 실제한다고 인식하고 이해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눈 앞에 생생히 살아있던 존재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그 기억들은 죽지 않는 역사성으로부터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현실적인 에너지와 활성화인데, 고대인들로부터 죽은 이들이 조상신으로 탈바꿈해 삶의 현실에도 작용하고 작동가능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데에는 역시나 그 삶의 진행방향선상에서 무언가의 필요와 요구로부터 시작되었지 않나 싶다
모든 구전설화들과 이야기들이 현실적 존재, 현세의 인간들의 삶과 일, 그 문제들과 얽히고 섥혀 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런 관점은 보다 사실적인 구성을 꾸미도록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의 본성에 신의 역할이 조력자의 자질과 능력을 가진 존재로 그려질 수 밖에 없는 게 사실?이고 앞서 산 인간들이 보다 그런 카리스마와 포스를 갖춘 존재로 그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지금 시대의 가공할 캐릭터들과도 일맥상통하는 그런 전형적 캐릭터에 대한 기대와 바램이 아닌가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언제나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에는 강조되어 있다
동양문화권, 중국문화권에 유별나게 그러한 신격화된 인간캐릭터들을 숭앙하고 숭배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는데, 사당이라고 하는 곳이 그런 맥락의 공간인 것이다
일본의 신사참배, 전범들을 숭배하는 그런 문화적 공간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현재, 현시대를 사는 현실의 중국인들에게도, 일본인들에게도 말이다
무당들도 대체로 그런 범주에서 현재와 현시대를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인 것이다
그런 보통의 사실들,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들은 인간들의 경험을 떠나 따로 머물고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해로울 수도,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인간들이 자기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대체로 멀리 하는 측면들을 볼 때, 역시나 그 상당한 거짓과 눈속임, 예의 속임수와 트릭, 긴가민가하는 모호함, 앞뒤가 안 맞는 모순의 연속되는 패턴들은 그 종합으로서 인간지성에게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존재가 사물화되어 있는 이상, 그 사물들을 아우르는 조화로운 시스템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그런 구조선상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어야만 분명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보이는 사물들의 세계 이면이나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가 있다는 가정과 추정이고, 그 확신과 신념이며 그렇게 유형무형의 모든 사물들이 한 사실로 통합된 세계가 그러한 세계관의 개념과 관념 이상으로 현실적인 사실이어야 하는 사실성의 진실에 있는 것이다
대체로 고대인들로부터 이원화되어 있는 그러한 세계관은 경험되지 않는 한 언제나 가정과 추정, 확신과 신념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이야기들이 대체로 시간을 따라 전개되는 만큼, 시간을 거스르거나 시간을 초월해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에너지와 활성화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러한 세계를 사실로 펼칠 수 있는 의도와 이유가 무엇인지는,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우주의 생성과 역사가 수축이냐, 팽창이냐 하는 힘과 에너지의 방향으로 사물들을 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존재해야 할 의의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의가 실제로 모든 사실들을 현실화하는 실체적 진실의 본질이 아닌가도 한다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지성으로 나아간다는 논리는 보이는 사물들로 구현된 것들이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지성의 세계를 산출해 낸다는 가정을 둘 수 밖에 없는데, 그 무한한 가능성이 사물들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성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언제나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자연으로부터 지성을 획득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자연으로부터 지성에 도달한다는 역사발전의 논리가 과연 자연적 사실들을 볼 때 가능할 지 의문이 아닌, 우려가 되는 것이다
나무들이 동물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동물들이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세계성을 볼 때, 그 어떤 돌연적 사유, 돌발 상황 때문에 지성이 산출되었다고 할 수 있을런지는 감히 머리로도, 입으로도 그 논리를 꾸밀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모든 사실들에 모순의 패턴은 동시에 그 사실들의 기저와 기제를 만든다
살도록 만들었는데,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지성의 인식과 이해가 어찌보면 그 모든 모순의 전형적 패턴일 것이다
그런 지성에 대한 위로와 안식은 언제나 사실들을 벗어나 있을 수가 없다
밑져야 본전이란 말은 실제 지성에게는 없는 사실인 것이다
모든 게 사실이어야먄 진실은 그 자리에서 자신을 그 본질로 둘 수 있는 것이다
인간지성이 신의 현존을 그러한 사실로 본다는 것은 차원적이고, 방향적인 것이다
결코 상태적이고 현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어렵고 난해한 복음의 진리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예수가 말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범죄를 수사하는 방식의 가장 핵심은 증거를 통해 그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범죄의 가장 핵심단서는 바로 그 범죄를 증거하는 어떤 것인 것이다
그러면 그 모든 범죄행위를 범죄라는 사실로 판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범죄자 스스로의 자백도 있지만,(자기가 저지른 범죄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더 붙일 수 있을까만은) 가장 유력한 범죄규명의 수단은 바로 증거, 그것도 물적증거인 것이다
정황판단이나 유도심문은 자백을 받아내거나 자백에는 못미치는 범죄에 대한 판단의 측면에 있는 것이다
예수는 진리에 있어서 그러한 증거자이며 증언자이다
진리에 대한 여러 측면의 접근법이란 그래서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예수를 보지 못하면,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는 논리는 신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모든 유다인들이 부정했던 예수를 같은 사람으로서 뭔가를 달리 보아야 할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체로 유다인들은 인간인 예수를 보았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며 목수였던, 그 어머니가 마리이이며 그 형제들이 있었던, 그런 자가 어디서 저렇게 지혜롭게 되었는지 하는, 먹보처럼 많이 먹고 술꾼처럼 많이 마시는 자인(건설현장일을 하면 그 고된 노동으로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고 더한 에너지가 보충되어야(술) 한다) 예수를 말이다
그런 예수가 갑자기 유다, 갈릴래아, 사마리아를 누비며 기적을 일으키고 율법과 계명에 대해 논하며 선을 베풀고 치유하고 죽은 이를 살리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미친자라고도 했고, 베엘제불(사탄)이 조력자라고도 했다
유다인들은 결정적으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정했다
그 모든 사실들 앞에 놓인 예수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있어 유다인들이 어디에 더 그 사실적인 판단을 두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오감은 인간지성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이 보다 그 사실성을 뚜렷이 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초자연적이니, 초자연적인 현상이니 하는 것은 사실로 겪게 되어도 그것이 일반적인 사실이 아니다 보니 그 사실을 사실로 겪어야 할, 그렇게 알아 보아야 할 난제를 실제로 남겨 두는 것이다
즉 자신이 경험한다 해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를 사실로 알아 보지 못하는 경험의 극단에 서게 된다는 말이다
창조도 하느님의 전능으로 인한 사실의 전개이지만, 그것은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자연적인 창조였던 것이다
그것을 거슬러?(전능에 거스른다는 표현이 과연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압축파일처럼 전능을 쏟아부어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사실로 인식하기에는 오감이 삭제된 것처럼 그 모든 상태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말로 하지 말고 보여주라
이 말은 시나리오를 쓰려는 작가의 원칙과도 같은 말이다
그러면 그 모든 사실들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사람이 신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가지려면, 그러한 차원을 이루는 신앙이 성립되어야 한다
사람입장에서 어떤 사실로 현존하는지 모르는 신에  대해서는 그러한 신앙의 입장이 서야 하는 것이다
때론 형이상학을 벗어나고 넘어서 있는 그 난해한 신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을 실체로 보여주지 않는 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이다
대체로 작용과 작동의 범주로 신존재가 그려지는 것은 고대로부터 구성된 신에 대한 이야기, 신과 인간들과의 이야기의 구조적 패턴이다
카톨릭 신자들도 사람이 된 신, 곧 예수가 사람으로 강생하기 이전에 어떤 신의 본질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들의 삶과 세상에 나타난(사람으로 강생한) 예수라는 역사적 신을 흠숭해야 할 신존재로 믿고 있는 것이다
분명 예수는 그러한 역사적 신인 것이다
신 전체인 신으로서의 예수는 그 어떤 인간들도 알지 못한다
삼위일체 속에서 제 2위격이며 제 1위격인 성부와 제 3위격인 성령과도 어떻게 동격이며 그런 실체로서의 신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단지 아는 것은, 인간으로서 아는 한은, 사람으로 강생한 그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 2위격인 성자인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에수는 누군가들의 말대로(그런 의도인 것이 아닌 약간 돌려 본다면) 인류사에서 만들어진 신인 것인가
분명 세상구원과 인간구원의 필요를 아는 존재는 그러한 신으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성부인 하느님이다
그냥 길가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듯 하는 구원이 인간구원과 인간들을 살도록 만든 세상구원은 아닌 것이다
자신이 거룩한 것처럼 사람들도 거룩해져야 함을 알고 있는 신인 것이다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신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구원은 그러한 신의 뜻과 신의 본질을 떠나서는,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을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가르치는 목적을 가진 율법은 세상끝날까지 폐지될 수 없고 그 율법을 거스르는 임의를 신이 마음대로 발휘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단지 보다 깊이있게 그 율법의 의의를 성립시키고 성취하는 길을 생명과 진리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그런 신으로서 자신을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카톨릭의 미사에처럼 희생제물이 되어 그 보편구원의 입장을 인간들에게 선사하고 회개의 문을 열어주며 헤븐으로의 성화와 의화로 이끄는 디딤돌이 된 것은 예수가 그러한 사명을 완수한 것은 역사적인 일인 것이다
죄가 없다면, 죄에서 구원해야 할 사명이 없다면 역사적으로도 없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죄가 있고, 그 인간들을 구원해야 할 필요가 있는 한, 그 역사는 하느님의 입장에서도, 인간들의 입장에서도 모든 일에 우선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죄의 끝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하느님은 인간들을 위한답시고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은 실제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본질에 비추어서 말이다
하느님은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신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예수를 통한 구원의 길을 계획하고 인간들의 세상에 그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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