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3일 (일)
(녹) 연중 제21주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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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신부님 [ 연중 제21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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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nelia2] 쪽지 캡슐

10:29 ㅣ No.191390

[연중 제21주일 가해] 마태 16,13-20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너의 그 한 마디 말도 그 웃음도 /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 쓸쓸한 그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산울림’이 부른 <너의 의미>라는 노래 가사 중 일부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 그가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그가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며 집중합니다. 그렇기에 하루에도 수십 혹은 수백 명씩 내 곁을 지나쳐가는 ‘행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은 나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때로는 그가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내 앞에서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그 이유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기에 아무리 어려운 수수께끼라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지요. 그렇게 그와 나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내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은 것은 비단 인간들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도 당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싶어 하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당신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 그리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는지를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일반적’인 부분에서 출발하여 틀린 점은 수정하고 잘못된 방향은 바로잡아 스스로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언젠가 구원자를 보내시면 자신들을 억압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다윗 시대에 누리던 번영과 영광을 회복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과 기대가 ‘메시아 신앙’ 속에 반영되었기에,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의 모습을,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특별한 제사를 드리는 ‘사제’의 모습을, 또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지혜로 이스라엘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위대한 ‘예언자’의 모습을 예수님께 기대했지요.

 

이처럼 군중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기대하고 바라는 점들을 전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을 스승이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이며, 그분께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욕망의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시려는 겁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맺은 일대일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과의 특별한 관계 안으로 초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왕’으로 임명되어 절대적 지위와 권한을 가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의 진정한 왕으로써 절대적 통치권을 가지신다는 뜻인데, 여기에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적인 호칭을 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하신 야훼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식한’ 어부 출신인 베드로가 성경과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런 대답을 했을리 만무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당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지만, 그분께서 왜 그런 행동들을 하시는지 그 이유와 의도를 알 수 없어 답답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만은 마음으로 분명하게 느끼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지니는 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셔야 가능한 일이기에,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가 ‘행복하다’고 선언하시지요.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가 고통이나 시련을 겪지 않는다고 ‘보장’해 주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로 미움과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힘든 과정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요. 그런 점이 오늘 제1독서의 마지막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 22,23) ‘무른 땅’에 박힌 말뚝은 쉽게 박힌 것만큼 작은 충격에도 쉽게 뽑혀나갑니다. 그러나 단단한 돌 바닥에 박힌 말뚝은 박을 때 온갖 고생을 하며 많은 땀을 흘린 것만큼 큰 충격에도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키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말뚝’같은 믿음을 지니기를 바라십니다. 그분께서 내 삶에 주고자 하시는 ‘의미’는 헤아리려고 하지 않고 그분을 이용하여 쉽고 편안한 삶만 누리려고 하면, 고통이나 시련이 닥쳤을 때 내 마음의 땅에서 믿음의 말뚝이 금새 뽑혀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찾는 신앙을,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왜 보내셨으며 나를 통해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에 귀 기울이는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단단히 묶어주는 ‘하늘의 열쇠’는 고통에서 구원의 의미를 찾는 ‘십자가의 길’ 안에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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