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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찬 성 목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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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아주 깊고도 아름다운 주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파스카, 그리고 그 파스카가 성체성사와 세족례로 이어지고, 마침내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파스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념합니다.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은 집을 '넘어갔다'라고 해서 ‘파스카’, 즉 ‘넘어감’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히 옛날이야기나 민족의 전통이 아닙니다. 유월절 식사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화하는 기억의 제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오늘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억압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습니다. 불안에서 담대함으로, 외로움에서 위안으로, 미움과 죄책감에서 용서와 평화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를 주셨습니다.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잔을 들어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여기서 질문해야 합니다. ‘기억한다’라는 게 뭘까요? 단순히 ‘아 예수님이 그런 일 하셨지!’ 하고 떠올리는 걸까요? 아닙니다. 기억이란, 그분의 삶을 지금, 내 삶 안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쪼개어 우리에게 나눠주셨듯이, 우리도 나 자신을 쪼개어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 성체성사를 제대로 받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발을 씻어 주신 겁니다. 그것도 자기를 배신할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너희의 주와 스승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발을 씻고 있습니까? 혹은, 나는 어떤 사람의 발은 절대로 못 씻겠다고 마음속에 선을 긋고 있지 않습니까?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발을 씻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체성사는 그냥 형식일 뿐입니다. 우리는 식탁에서 그분의 사랑을 먹고 마셨으면, 이제 그 사랑을 ‘손’으로, ‘무릎’으로, ‘눈물’로 실천해야 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고, 이웃의 아픔에 무릎 꿇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실제로 살아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2001년, 일본의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수현 청년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유학 온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퇴근길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던 그 순간,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자신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 순간, 그는 누군가의 ‘더럽고 위험한 발’을 씻어 준 겁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평생을 헌신하다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의사이자 음악가였고, 사제였습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 곁에서 함께 울고, 노래하고, 약을 발라주고,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분은 말없이 매일 수많은 이들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이 두 분은 우리 시대의 파스카 적 인물입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파스카는, 그냥 옛날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도 아니고, 2천 년 전 예수님의 만찬 장면도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 내가 선택해야 할 삶의 방향입니다. 구약의 파스카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의 넘어감’이었다면, 신약의 파스카는 ‘죄에서 은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파스카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사랑과 섬김의 삶으로 넘어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억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이수현과 이태석 신부님처럼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큰 사랑을 매일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도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 주는 삶은 가능합니다. 요즘 우리 삶은 참 빠르고, 바쁘고, 각자도생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함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마음에 걸리는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보세요. "요즘 힘들지 않았어?" 한 끼 식사를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대신 해주는 것도 ‘발을 씻어 주는 사랑’입니다. 성당에서 낯선 얼굴에 먼저 다가가 인사해 보세요. 봉사자가 실수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로 감싸주세요. 그 말이 바로 ‘세족례’입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바쁜 와중에도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 뒷담화 대신 칭찬의 말을 건네는 것. 그것도 발을 씻어 주는 일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서운했던 사람’의 발도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발도 씻으셨듯이 말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