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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 32년만에 털어놓은 ‘실미도의 증언’
청주 김방일씨 실화소설 발간, 684부대 창설부터 폭파까지 증언 31명의 민간인 훈련대원 가운데 ‘청주 출신 1명 있었다’ 확인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훈련교관이었던 김방일씨(59·청주 거주)의 경험담을 토대로 쓰여진 실화소설 ‘실미도의 증언’ 출판기념회가 11일 청주 명암타워에서 열렸다. 청주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는 김씨는 민간인출신으로 구성된 ‘실미도 북파공작원’ 훈련을 지휘하고 71년도 서울진입 난동사건 직후에는 훈련막사를 폭파시키는등 사후수습을 한 장본인이다. 일명 '김일성주석궁 폭파부대'로 알려진 실미도 북파공작원 훈련부대는 68년 김신조 무장간첩단 서울침투 직후 보복공격 차원에서 창설됐다. 당시 공군 특수부대 중사였던 김방일씨는 안기부로부터 훈련교관으로 차출돼 3년간 이들을 훈련시켰다. 하지만 남북관계 해빙으로 북파공작이 중단된 상황에서 보급등 대우가 열악해지자 훈련대원 24명은 71년 8월 기간병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겠다며 서울로 진입하다 군경의 제지에 가로막혀 자폭했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4명은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됐다. 훈련대원들은 전과자 출신이 많았으며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부대를 운영했다.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은 남북관계의 비밀스런 사안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진실이 은폐됐으나 지난 99년 김방일씨가 <충청리뷰>와 단독인터뷰를 가졌고 MBC가 ‘이젠 말할 수있다’ 프로그램을 통해 진상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자전소설 ‘실미도의 증언’을 통해 훈련대원 가운데 청주 출신 인물이 있었으며 유가족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밝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탈법적인 방법으로 차출돼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비명에 사라진 31명의 원혼에 대해, 과연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실미도의 증언’ 가운데 핵심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 박대통령 직접지시"
1945년 충주시 교현동에서 태어난 김방일씨는 초등학교 시절 청주 금천동의 빈민촌이었던 ‘갱 변’으로 이사왔다. 일제 당시 금천동 뒤쪽 이정골에 금광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갱 변’으로 불렸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김씨는 세광고교로 입학했고 고교시절 태권고 유도 유단자이면서 학생회 간부를 맡는등 남다른 통솔력을 보였다. 생활고로 대학진학을 포기한 김씨는 공군하사관 모집공고를 일고고 입대를 결심한다. “하사관을 이수하면 대학도 보내주고 외국유학도 시켜준다는 특전을 보고 65년도에 공군하사관 27기로 입대해 정보특기를 부여받았다” 김씨는 하사관 임관후 서울 오류동 공군 정보부대인 2426전대에 배속됐고 낙하훈련을 받기도 했다. 특히 67년 특수공작훈련 제1기생으로 차출돼 국내 훈련뿐만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보교육과 필리핀 정글에서 생환교육까지 끝내 전문적인 ‘특수공작원’으로 거듭났다. 이듬해인 68년 1?21 김신조 무장간첩단 서울침투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6월 김씨는 중앙정보부에 차출돼 느닷없이 청와대 방문을 하게 된다. 실미도 교육대장 김준철 준위와 중앙정보부 담당국장?부장 그리고 김씨 등 4명이 직접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했다. 당시 박대통령은 “김일성이가 내 모가가지를 딴다 했단 말이야, 임자들 그말을 어케 생각하나? 내가 김일성이의 모가를 따야 하는게 아냐?”라며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것. 박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씨의 중사 계급장을 떼어내고 소위 계급장을 달아주며 격려했다.
=특수훈련 장소 중정이 물색했다=
박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앞서 중앙정보부는 이미 3개월전에 보복공격 방침을 정하고 은밀하게 북파공작원 훈련장소를 물색했다. 중정 공작과장과 조정관이 직접 공군 정보부대 공작선을 타고 서해안 일대의 무인도를 둘러봤다. 북방한계선에 인접한 연평도, 우도 인근은 사격과 폭파훈련으로 인해 북측과 신경전이 벌어질 수 있어 배제됐고 최종적으로 무의도와 연결된 실미도가 낙착됐다. 하루중 낮 6시간 동안만 바닷길이 열려 무의도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훈련대원의 이탈방지과 보안유지에도 적합했다. 이에따라 1개월뒤인 68년 4월 중정의 지시에 따라 공군정보부대 출신인 실미도 교육대장 김??준위과 특수공작교육이수자인 소대장 4명을 비롯해 경비 등을 맡을 기간요원 31명이 은밀하게 실미도에 발을 디텼다. 이들은 실미도 파견 한달전부터 일체의 화기, 장비에 새겨진 공군마크와 부대번호를 지우는 작업을 벌였다. 실체는 있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는 ‘도깨비 부대’로 만든 것이다. 실제로 외부 보안유지를 위해 대형장비도 없이 2개월동안 기간요원들이 식수개발, 막사 건립, 특수훈련장 조성 등 막노동을 실시했다.
=민간인 훈련대원 어떻게 차출했나=
민간인으로 구성된 31명의 훈련대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직접 포섭한 20대 청년들이었다. 주로 서울, 경기, 충청권에서 끌어들였으며 폭력등의 혐의로 형사처벌 기로에 놓인 주먹꾼이나 부모가 없는 서커스단 곡예사, 직장을 못잡고 빈둥대는 실업자 등 사회 비주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연좌제의 굴레를 벗겨주겠다’ ‘형사처벌 면제해 주고 먹고 살도록 해주겠다’ ‘직장 잡아주고 평생 보장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졌고 스스로 ‘악마의 섬’을 선택했다. 중정요원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접근한 뒤 “군대 한번 더 가는 셈치고 특수목적만 달성하면 팔자를 고친다”고 설득했다. 포섭당한 20대 청년들은 ‘가족들에게도 절대 비밀’을 당부한 중정요원들의 말에따라 은밀하게 약속된 서울역 부근 태흥빌딩 2층 기관원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인천 차이나타운 여인숙으로 이동한 뒤 새벽 4시께 실미도로 향하는 공작선에 몸을 실었다.
<2 면> ‘주석궁을 폭파하라, 체포되면 자폭하라’ -북 124군부대 보다 무장행군 능력 앞서, ‘인간병기’ 훈련- -70년 이수근 사건직후 북파명령, 비행정 탔다가 작전취소-
=‘3개월안에 북파능력 숙지시켜라’=
68년 7월 7일, 행운의 숫자가 겹친 날 ‘684부대’ 일명 ‘주석궁 폭파부대’는 실미도에서 자체적인 부대 창설식을 가졌다. 684부대는 68년 4월 부대 창설이 결정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설초기 중정이 직접관리하는 조직답게 모든 보급과 처우는 최상급이었다. 훈련대원의 사기도 충천해 훈련성과가 눈에 띄게 향상됐다. 하지만 외줄타기 유격훈련 과정에서 2명의 대원이 바위위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후송치료를 받았지만 부러진 다리가 정상회복이 불가능해 모두 취사병으로 내정됐다. 대원들은 북한식 행진과 군가도 배웠고 말투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학습시켰다. 훈련강도가 높아지면서 최초의 부대이탈 사고가 발생했다. 야간 독보법 훈련 과정에서 새벽 6시까지 부대로 복귀하도록 했으나 8시가 되도록 2명의 대원이 보이지 않았다. 몇시간뒤 마을 민가의 부엌 아궁이속에 숨어있던 2명이 출동한 기간요원과 대원들에 의해 붙잡혔고 이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포박당한채 부대로 끌려왔다. 포박당한 2명은 훈련대장의 지시에 따라 뭉둥이를 든 동료 대원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684부대는 당초 이탈자에 대해서는 ‘군법에 의하지 않고 처단한다’고 숙지시켰던 것이다. 중정은 당초 3개월간 훈련을 완성시키고 곧바로 북파시킬 계획이었다. 훈련개시 2개월뒤 훈련대원들의 48kg 완전군장 산악행군 능력이 시속 13km에 달해 김신조의 124군부대가 자랑하는 시속 11.7km를 이미 능가했다. 사격훈련도 대원 1인당 하루 450발을 소모할 정도였고 낙하훈련과 단검?도끼 던지기까지 습득해 완벽한 ‘인간병기’로 연마됐다. 하지만 8월말 무장 4km 수영훈련 과정에서 또 한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작전이 개시되기도 전에 3명이 사망하고 2명은 훈련불능의 부상을 입은 셈이었다.
=지연되는 북파공작, 커지는 욕구불만=
3개월 훈련시한이 꽉찬 9월, 684부대는 작전명령만을 학수고대하는 입장이었다. 훈련대원들은 어차피 목숨을 저당잡힌 입장에서, 특수임무를 완수하고 하루빨리 약속된 대가를 얻기를 바라는 심정이 컸다. 하지만 당시 미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으로 북미간의 협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중정은 독자적인 북파공작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9월 작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부대는 반복훈련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긴장이 느슨해진 가운데 이른바 ‘하극상’ 사건이 벌어졌다. 땔감을 구하기위해 산에 간 훈련대원 A가 경비감시를 위해 따라간 기간요원을 폭행했던 것. 특히 훈련대원 중에서도 왕초노릇을 하던 A는 동료대원들을 화장실로 불러내 성폭행하는 등 원성이 자자했던 상황이었다. 훈련대원 기강해이에 위기감을 느낀 훈련대장은 하극상을 이유로 A씨를 포박시킨채 대원들의 몽둥이 ‘즉결심판’을 지시했다. 결국 또 한사람의 청년이 숨을 거뒀고 몇 달 전 탈주하다 적발돼 죽임을 당한 두명의 시신과 함께 모두 자체 화장처리했다. 이미 대한민국 호적에서 이름이 사라진 훈련대원들의 신병처리는 아무런 적법절차도 필요없었다. 한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과정은 즉흥적이고 잔혹한 ‘정글의 법칙’으로 통했다.
=이수근 사건직후 북파침투 명령 떨어져=
69년 1월 귀순한 이수근이 콧수염 변장을 하고 김포공항을 빠져나갔다가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검거돼 한국으로 압송됐다. 이수근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았고 같은 해 7월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수근 사건직후 중정에서는 나름대로 북파공작 시기를 결정했고 684부대에 1개조(9명)의 북파공작원을 선발하도록 지시했다. 선발된 공작원들은 발대식을 갖고 서해안 북쪽 침투기지로 이동했다. 이들은 수소를 채워 정적부량으로 공중을 나는 경비행기인 ‘베론’을 타고 북한 평양 상공까지 침투키로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베론’은 기체를 빼면서 서서히 착륙해 흔적도 없이 땅속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마침내 D-DAY 전날밤 중정 책임자는 양주파티를 열었고 훈련대원들은 술기운에 번지자 연신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다음날 밤 9시 비행선 ‘베론’에 수소를 채우고 풍향과 풍속을 체크했다. 마침내 새벽 3시 침투시각이 다가왔고 실미도 북파공작원 9명이 베론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이 순간 상부로부터 무전연락이 떨어졌다. ‘북파 침투 중지’ ‘전 공작원은 베론에서 하선하고 대기하라’ 이로부터 1개월 가량 침투기지에 더 머물던 북파공작원들은 다시 실미도로 돌아와야만 했다.
(별도박스) =청주출신 ‘단검의 귀재’가 있었다=
-김방일씨, ‘왜곡 바로잡기 위해 출간 결심, 아직도 못다한 말 있다’ 김방일씨의 ‘실미도의 증언’에는 청주출신 훈련대원 김동주(가명)에 대한 추억이 5쪽에 걸쳐 실려있다. 청주 영운동 출신으로 청남초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가출해 구두딱이를 하다가 곡마단장을 만나 서커스판에 끼어들게 된다. 김동주는 단검투척을 장기로 배웠고 전국을 유랑하며 7-8년을 보냈다. 공연장에서 정보기관 요원을 만나 포섭된 뒤 아무도 모르게 실미도로 향했다. 김방일 당시 훈련교관은 김동주와 청주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김동주의 아버지가 부친의 친구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특수부대 훈련교관의 신분이기 때문에 감출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고향 청주에 내려갔을 당시 김동주 부친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는 것. 김방일씨의 아버지와 동네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다 휴가차 내려간 친구 아들을 만났고 “우리 셋째가 자네와 같은 나이인데, 집에 있었다면 군대에 가 있을텐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연락이 없어”라며 안타까워 했다는 것. 김방일씨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채 답답한 심정을 삭여야만 했다.
기사탈고를 앞두고 취재진은 지난 18일 김방일씨와 전화연락을 취했다. 전날 서울에서 열린 영화 ‘실미도’ 시사회에 다녀온 김씨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영화로 구성된 장면을 보면서 실미도의 3년 생활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구천을 떠돌고 있을 대원들의 원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김씨는 청주 출신 김동주(가명)의 실존여부에 대해 “사실이며 현재 가족들의 연락처는 알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실화소설 ‘실미도의 증언’ 발간 동기에 대해서는 “수년전에 실미도를 소재로 발간된 소설내용 가운데 납득하지 못할 부분이 많았다. 실미도 684부대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알고있는 내가 최대한 진실을 밝혀야만 왜곡된 ‘실미도’가 바로잡힐 것 같아 나서게 됐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밝히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고 말했다. ‘실미도의 증언’은 대형서점을 통해 판매되고 있지만 언론매체를 통한 서적광고를 하지 않고 있다. ‘실미도의 증인’ 김방일씨가 자신의 실화소설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꺼려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3면> =버려진 684부대, 예고된 무장난동 사건= -71년 8월 ‘박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하자’ 대원 24명 서울난입- -3년 훈련기간 동안 7명 사명, 생존자 4명 사형집행전 애국가 불러-
=최초의 무장 난동사건이 벌어져=
선발대의 북파작전이 다시 수포로 돌아가자 실미도 훈련대원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주석궁 폭파’를 위해 창설된 ‘도깨비 부대’가 북파공작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원들은 활력을 잃었고 70년 봄 연병장에서 야간영화를 상영하던 중 3명의 대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들은 부대의 유선통신망을 절단한채 탄약고에서 실탄과 수류탄까지 챙기고 무의도로 숨어들었다.
전 대원과 기간병들은 무장을 한 채 무의도로 향했고 무의초교 관사에서 마을주민과 교사 학생 등 16명을 인질로 잡고 있는 탈주대원들과 대치하게 됐다. 다행히 바다를 헤엄쳐오는 바람에 이들은 총과 실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훈련교관들이 설득하려 했지만 탈주대원들은 ‘24시간 이내에 자폭하겠다’며 불응했다. 결국 5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몽둥이를 든채 창문과 현관으로 난입해 제압하기로 했다. ‘돌격’하는 신호와 함께 뛰어들자 두 명은 갖고있던 칼로 자살을 기도해 숨졌고 한명은 목을 찔린채 숨을 쉬고 있었다. 다행히 인질들은 모두 무사했지만 앞서 무의도에 놀러왔던 아가씨 2명이 탈주대원들에 의해 성폭행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장에서 목숨을 부지한 한 명은 결국 부대로 돌아와 훈련교관 하모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제 31명의 684부대원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2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는 무의도 무장난동사건이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인천 사창가로 단체외출=
684부대원들의 무의도 인질 강간사건이 벌어지자 중정에서는 사기진작책으로 단체외출을 시켜주도록 지시했다. 이에따라 인천 북평동에 미리 물색해둔 여인숙에 24명의 공작원을 단체투숙시켰고 사전에 선발해 보안교육까지 시킨 직업여성들을 각 방으로 들여보냈다. 20대의 피끓는 훈련대원들은 3년만에 회포를 푼 셈이었다. 지하계단 구조의 여인숙 입구와 출구는 기간요원들이 밤새 불침번을 서야했다.
밤새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에서도 일부 대원들은 여자들의 손톱이나 미리 준비해준 계란의 껍질 등에 주소를 적어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기간요원들은 아가씨들에 대한 몸수색까지 벌여 겨드랑이에 적은 글씨까지도 철저하게 지워버렸다. 새벽 5시 인근 해장국집에서 속을 푼 이들은 하룻밤 ‘세상 나들이’를 접고 다시 실미도 공작선에 몸을 실었다.
=중단된 북파공작, 버려진 684부대=
70년 8월 15일 박정희대통령은 남북한 상호비방 금지, 교류협력 증진 등을 제시한 이른바 ‘8?15선언’을 하게 된다. 이듬해 남북 적십자회담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실미도 684부대는 살벌한 훈련이 없어지고 평범한 일반 파견부대의 생활로 변해갔다. 주민들의 부대 근접 어로행위도 그대로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중정도 남북관계 해빙에 따라 684부대를 잊어버렸고 보급과 부식이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고급담배는 화랑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훈련대원들의 월급도 지급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간요원들과 훈련교관들도 돈과 빽을 동원해 육지 부대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특수교육도 받지않은 교관으로 대치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71년도에 접어들면서 훈련대원이나 교육대장, 훈련교관들은 실미도 684부대의 장래에 대해 최고조의 고민에 휩싸였다. 부대간부들은 정보부와 공군에 수차례 사후처리 방안을 질의했지만 이렇다할 답변도 없었다.
마침내 8월 중순 대원들의 사격훈련중에 무의도 어민이 유탄에 맞는 사고가 발생했고 김방일 훈련교관은 부상어민을 후송하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다시 공작선을 타고 실미도로 돌아가려는 순간 부둣가 파견초소에서 약혼녀의 전화가 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러자 함께 탔던 교육대장이 김씨에게 외박을 허용했고 ‘천우신조’로 다시 뭍을 밟게 된다.
결국 다음날인 ??일 새벽 6시께 24명의 훈련대원은 집단적인 무장난동을 일으킨다. 교육대장을 비롯한 기간병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살육전을 벌여 12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았다. 가까스로 이들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기간병은 ?명으로 현재 ‘실미전우회’(회장 김방일)를 구성해 정례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무의도에서 어선을 동원해 인천으로 잠입한 난동대원들은 시내버스를 탈취한채 서울로 향했다. 청와대에서 박정희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하소연하겠다는 뜻이었다.
=5시간에 걸친 광란의 도심 난동극=
무장군복으로 인천에 내린 난동대원들은 제일 먼저 목욕탕에 들른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실미도의 피비린내를 먼저 씻겨내려는 의도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후 시내버스를 탈취했다가 직행버스로 옮긴 뒤 10여명의 승객을 인질삼아 서울로 향했다. 이때 버스를 제지시키려던 교통경찰이 이들의 조준사격에 의해 첫 민간인 희생자가 된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직행버스 승객이었던 이강인씨(당시 40)는 이들이 승객들에게 한 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만 훈련받으면 팔자고치게 해 준다고 약속해놓고 4년이 지나도록 십원짜리 동전한닢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깡보리밥에 매만 실컷 두들겨맞고 죽을 고생을 했고 심지어 동료 가운데는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 승객 이씨의 증언은 폭발직전의 실미도 684부대원들의 심정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서울에 접어들면서 버스기사가 감시눈길이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고 할 수없이 대원중에 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았다. 하지만 운전이 미숙해 결국 대방동에서 잠복중이던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버스는 국정교과서 앞에서 길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멈춰섰다. 잠시후 3발의 수류탄 폭음이 터졌고 마침내 5시간(인천 잠입이후)에 걸친 무장 난동사건은 자폭으로 막을 내렸다.
이들과 경찰의 교전으로 경찰, 민간인 6명이 사망했고 16명이 부상당했다. 여기에 실미도에서 사살된 기간병을 합치면 사망자는 18명으로 늘어난다. 또한 훈련대원들은 실미도에서 숨진 2명과 자폭한 18명을 포함, 총 20명이 숨졌고 4명이 현장에서 살아남아 군사법정에 서게 된다. 생존자 4명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듬해인 72년 3월 10일 공군비행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이들은 사형집행장에서 마지막으로 애국가를 불렀고 대한민국 만세를 3번 외친 뒤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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