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려잡자 김일성! 통신보안 00번 허 병장입니다."
1970년대 중반 군부대 내에서 전화를 받을 때 '반드시' 사용해야 했던 구호다. 직책상 전화를 끼고 근무하던 당시 허 병장. 그가 혼자서 '때려잡은' 김일성만 얼마나 되던가. 숱하게 때려잡힌 김일성이 지금 화려한 '부활'을 앞두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입법안에 따르면 김일성 주체사상을 찬양하고, 김일성 일대기를 인터넷에 올리고, 차량에 인공기를 달고 질주해도 괜찮은 세상이 된다.
사실 김일성이 대학가 골방에서'위대한 수령'으로 둔갑한 지는 오래 전이다.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외세를 배격한 자주 노선으로 민족 정기를 살린 지도자.'그가 이젠 대학가 골방에서 해방돼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대로를 활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야당이 반대하고 있어 법안 통과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권여당에 의해 그러한 친북적 법안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다. 이미 남한은 김일성과 북한을 안마당으로 불러들일 정도로 넉넉한 사회가 된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형법 보완만으론 간첩행위 등을 처벌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열린우리당 측은 내란죄로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김일성.인공기.주체사상쯤은 이제 용인해도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과연 우리 사회의 안보역량이 그만큼 성숙한 것일까? 6.25 전란 중에 태어나 반공이 육화된 태생적 '때려잡자' 세대로선 충격이다. 정서상 용납이 안 되고, 이러다 북한에 먹히는 게 아닌지 극히 불안하다. 의심이 꼬리를 물며 급기야 정부.여당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법안을 주도한 핵심 386의원에게 물어봤다. "민족의 정통성을 김일성 체제에서 찾고, 그 연장선상에서 통일을 구상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그는 펄쩍 뛰었다. "민주주의가 확고히 승리해 체제경쟁이 끝난 상태다." 남한 체제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순수한 역사바로잡기요, 남북 벽 허물기 작업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도 석연찮다. 특히 몇몇 '반성한' 386들은 "북한의 대남 적화기구인 한민전의 방송을 운동지침으로 삼았던 골수 주사파 출신들이 현 정권 내 다수를 점하고 있으나 과거 행적을 반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어 의혹은 더 짙어졌다. 주사파들이 주도하는 보안법 폐지라면 더 이상 토론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 386의원들은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우리를 주사파로 보이게 했던 자들이 자기만 전향한 뒤, 순수하게 학생운동을 했던 우리에게 사상의 덮개를 씌운다." 그러곤 "우리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며 더군다나 북쪽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적이 안도가 되는 해명이다. 그게 정말이라면, 정부 여당 내 386들에게 딱 한 가지만 해달라고 권하고 싶다. 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70%대의 여론 중 상당수는 추진 세력의 성향을 의심하고 있다. 그 의심을 풀어주는 일이다. 북한 노선 지지자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선명히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붙어있는 주홍글씨를 떼내라는 것이다.
그동안 386들은 남북 평화공존과 적대관계 해소 등을 무수히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김일성.김정일 세습 독재체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적 인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말을 아껴왔다. 진정 북 체제의 모순에 동의한다면 바로 이러한 핵심 문제를 다뤄야 한다. 스스로를 프리즘에 대고 진정한 색깔을 드러내 보라. 예비역 허 병장 같은 '때려잡자'세대들의 색깔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그러한 색깔검증이 필요하다. 그런 뒤에야 보안법 개.폐에 따른 안보대책 등 진정한 후속토론이 가능하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
2004.10.20 18:29 입력 / 2004.10.20 18:37 수정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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