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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만행후 36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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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동 [ynin]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73790

살아남은 '이승복 가족' 지금은
공비 만행후 36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형 학관씨 아들, "칼자국투성이 아빠 등 밀때마다 눈물"
강릉=김봉기기자 knight@chosun.com
무주=이용수기자 hejsue@chosun.com
서울=신은진기자 momof@chosun.com
입력 : 2004.10.29 18:51 07' / 수정 : 2004.10.29 23:51 13'


▲ 29일 전북 무주에서 만난 이승복의 형 이학관씨는“당시 상황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된 지난 12
년 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이용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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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교2동. 29일 이곳에 있는 고(故) 이승복군의 형 이학관(49)씨 집을 찾기 위해 부인 김인자(46)씨에게 전화하자 “제발 집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님(이승복군 아버지)이 (기자가 왔다는 사실을) 아시면 우리가 3~4일 동안 시달린다”는 얘기였다.

이날 학관(남동발전㈜ 과장)씨는 전북 무주에 출장을 떠나 있었고, 1980년 학관씨와 결혼한 부인은 비명에 간 시동생·시누이 3명과 시어머니 위패를 모신 강릉시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에서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초가집에서 일어난 이승복 일가 참살(慘殺) 사건. 당시 가족 7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3명이었다. 36곳에 칼을 맞고도 거름더미에서 살아남은 형 학관씨, 이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기적적으로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73)씨. 그러나 이웃집에 있다가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80년 세상을 등졌다.

몸의 상처는 곧 나았다. 하지만 가슴에 묻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감싸고 또 감싸주어도 치유될 수 없는 유족들의 상처… 그런 가운데 1992년 돌연 제기된 ‘이승복 사건 작문(作文)’ 주장은 여기에 또다시 비수를 꽂았다.


▲ 29일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이승복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당시 자료사진 앞에서 기념관 황태병 장학사의 설명에 귀기울이고 있다. / 최순호기자
전북 무주에서 만난 형 학관씨는 사건 직후 남은 가족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건 이듬해인) 69년부터 아버지와 할머니의 정신착란이 시작됐어. 아버지는 동해와 춘천에 있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면서 10년 이상 병원 신세를 진 것 같아. 할머니는 생전에 소리를 지르시고, 봉평시장에 가서 욕하고. 할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데 나는 평생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 하지만 하도 힘들어 아버지에게 ‘같이 죽자’며 대든 적도 있어. 정신을 놓아버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오. 자식들 보면서 ‘나까지 이상해지면 안 된다’ 모질게 마음을 먹고 겨우겨우 버텨왔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 창빈(23)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어릴 때는 (이승복)기념관 가는 게 좋았어요. 아빠 사진이 있으니까 신기했지요. 하지만 철이 들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 다음엔 마음이 아파 자주 안 갔어요.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서 등을 밀어주다 보면 등에 칼자국이 있었지요. 머리에도 3개 정도 상처가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상처가 아직 남아 있어요. 그거 보면 때를 밀다가도 눈물이 나요.”

학관씨는 사건 후 외가(外家)인 봉평을 전전하다 강릉상고에 진학했다. 강릉 현재 집으로 이사한 것은 81년. “국방부 정훈국에선가 와서 ‘어떻게 이렇게 사느냐’며 국가유공자 지정을 받게끔 도움말을 해줬지. 다른 행사에서 만난 군 관계자도 ‘이런 분이 강릉에서 전셋집에 사는 것 알았느냐’며 강릉시 등에 얘기해 시유지를 주고 1000만원도 집 지으라고 줬소.” 이런 도움이 유족을 지탱해주는 힘이 됐다.


▲ 29일 이승복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이승복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 최순호기자
학관씨는 “가장 힘들었던 때는 ‘작문 주장’ 이후”라고 말했다. “TV에서 (승복이 얘기가) 방영될 때마다 아는 사람들은 물론 ‘안됐다’고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낸 거래’,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그거 다 가짜래’ 이런 말을 했지. 그 후론 회사도 제대로 못 가 결국 1년 동안 병가를 냈어요. 누가 찾아오면 안 만나려고 기를 썼지. 말 주변이 변변치 않아서.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소.” 그는 눈물을 쏟았다. “내 자신이 한심해. 내가 말도 잘하고 그랬으면….”

아들 창빈씨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고3 때 학교에 갈 때 MBC 기자가 집 앞에서 기다리며 학교 가는 길을 따라가기도 했어요. ‘너희 아빠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이렇게 말을 거는 거예요. ‘아빠가 뭘 잘못했는데요’ 따지고 싶었지만, 항상 집에서 어른을 공경하라고 배웠거든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갔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인터뷰를 안 해도 보도 내용은 그런 식으로 편집돼서 나가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나쁜 쪽으로만 나가고…. 나중엔 코미디 프로에서까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패러디해서 웃기는 데까지 사용했어요. 그러면 그냥 TV를 꺼버려요. 화도 나고 마음도 상하고…. 사람이 무서웠어요.”

학관씨는 “(판결 내용을) 전해 듣는 순간 36년 동안 지내온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에서 돌아가더라”고 말했다. “세상이 야속했지. 내 말을 두고 거짓말이니 뭐니 했던 사람들…. 난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겨우 열세 살 아이였어. 아는 것이라곤 내가 살던 산골이 전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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