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학관씨 아들, "칼자국투성이 아빠 등 밀때마다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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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학관(남동발전㈜ 과장)씨는 전북 무주에 출장을 떠나 있었고, 1980년 학관씨와 결혼한 부인은 비명에 간 시동생·시누이 3명과 시어머니 위패를 모신 강릉시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에서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초가집에서 일어난 이승복 일가 참살(慘殺) 사건. 당시 가족 7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3명이었다. 36곳에 칼을 맞고도 거름더미에서 살아남은 형 학관씨, 이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기적적으로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73)씨. 그러나 이웃집에 있다가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80년 세상을 등졌다.
몸의 상처는 곧 나았다. 하지만 가슴에 묻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감싸고 또 감싸주어도 치유될 수 없는 유족들의 상처… 그런 가운데 1992년 돌연 제기된 ‘이승복 사건 작문(作文)’ 주장은 여기에 또다시 비수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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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 창빈(23)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어릴 때는 (이승복)기념관 가는 게 좋았어요. 아빠 사진이 있으니까 신기했지요. 하지만 철이 들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 다음엔 마음이 아파 자주 안 갔어요.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서 등을 밀어주다 보면 등에 칼자국이 있었지요. 머리에도 3개 정도 상처가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상처가 아직 남아 있어요. 그거 보면 때를 밀다가도 눈물이 나요.”
학관씨는 사건 후 외가(外家)인 봉평을 전전하다 강릉상고에 진학했다. 강릉 현재 집으로 이사한 것은 81년. “국방부 정훈국에선가 와서 ‘어떻게 이렇게 사느냐’며 국가유공자 지정을 받게끔 도움말을 해줬지. 다른 행사에서 만난 군 관계자도 ‘이런 분이 강릉에서 전셋집에 사는 것 알았느냐’며 강릉시 등에 얘기해 시유지를 주고 1000만원도 집 지으라고 줬소.” 이런 도움이 유족을 지탱해주는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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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창빈씨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고3 때 학교에 갈 때 MBC 기자가 집 앞에서 기다리며 학교 가는 길을 따라가기도 했어요. ‘너희 아빠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이렇게 말을 거는 거예요. ‘아빠가 뭘 잘못했는데요’ 따지고 싶었지만, 항상 집에서 어른을 공경하라고 배웠거든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갔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인터뷰를 안 해도 보도 내용은 그런 식으로 편집돼서 나가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나쁜 쪽으로만 나가고…. 나중엔 코미디 프로에서까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패러디해서 웃기는 데까지 사용했어요. 그러면 그냥 TV를 꺼버려요. 화도 나고 마음도 상하고…. 사람이 무서웠어요.”
학관씨는 “(판결 내용을) 전해 듣는 순간 36년 동안 지내온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에서 돌아가더라”고 말했다. “세상이 야속했지. 내 말을 두고 거짓말이니 뭐니 했던 사람들…. 난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겨우 열세 살 아이였어. 아는 것이라곤 내가 살던 산골이 전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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