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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지를 찾아서 11 (신앙고백비:돌에 새겨진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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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rbk2236]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75016

     (  안동 교구편  )


 

- 독특한 형태의 이 신앙고백비는 밖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앙을 돌에 새겨놓은 신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

 

경북  상주시 청리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다. 이 곳 석간산(石壇山) 아래 현

 

재의 청리면 삼괴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 고백

 

비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군에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에 의해 처음 복음

 

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

 

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삼괴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김씨 집안 김복운(金

 

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차남인 삼록(三錄, 도미니코, 1843-1932

 

년)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

 

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악랄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66년 한

 

불 수호 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석단문내부 모습, 아마 마을제사를 지내던 곳이 아닌가 싶다 -

 

1894년부터 1900년 초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

 

이 살고 있던 석단산(石壇山) 아래 높이 127센티미터, 폭 39센티미터, 두께 22센티미터, 두께 22센티미터의 신

 

앙고백비(信仰告白碑)를 건립한 것이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비롯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하나 아직 지방에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자

 

신의 신앙 고백을 이렇듯 감대하게 했다는 점에서 신앙 고백비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신앙 고백비가 공식적인 교회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이제 겨우 10년을 넘어섰다.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

 

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

 

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 고

 

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됐다.

찾아가는 길
경부 고속도로 김천 인터체인지에서 김천 시내로 들어서 상부 방면으로 3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상주시 청리면 소재지에 이른다. 이곳서 외남면 신상리 쪽으로 접어들어 다리를 건너면 청리 장로 교회가 보인다. 우측으로 접어들어 마을길을 따라 2.3km 정도 들어가면 과수원이 나오고 석단문 옆에 신앙 고백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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