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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레 무아, 르 들뤼주(apres moi, le deluge).
프랑스 혁명 전야의 국왕이던 루이 15세가 죽기 직전에 했다는 이 말은 ‘나 이후에 대재앙’(after me, the disaster)이라는 의미다.
무려 59년 동안(1715~1774) 왕위에 있었던 루이 15세는 국가재정 파탄, 조세 형평성 상실, 귀족계급 타락과 시민계급 부상등으로 인해 구체제의 모순이 극심해지자 자신이 죽은 뒤 큰 재난이 닥칠 것이라며 그렇게 예언했다. 실제로 1789년7월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계기로 대혁명의 막이 올랐다.
루이 15세가 남긴 말은 여러 경우에 비유되지만 ‘내가 물러난 이후에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식의 무책임한 행동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된다. 최근에는 9·11테러가 발생한 이후 미국 공화당 계열 인사들이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 정권에 책임을 돌리면서 이 논리를 동원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중 발생한 각종 선행 테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9·11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불행히도 민주화 이후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임기중 선진국 클럽(OECD) 가입을 겨냥한 김영삼 대통령의 무리한 세계화 추진은 외환위기로 연결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나친 정보산업(IT)경기 및 소비 진작 정책은 대형 부정부패와 신용불량자 양산, 내수경기 위축을 초래했다.
그 반대 현상도 보편화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직도 경기 침체의 원인을 김대중 정권 말기의 경기부양 탓으로 돌리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임기말까지 외환위기에 많은 책임을 떠넘겼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지난 19일 칠레 방문 중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하면서도 “다음 시대에 숙제를 한가지씩 꼬박꼬박 넘기긴 했다”고 지적했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 임기 초에는 모두 자신의 업적을 걸고, 후계 정권을 당당하게 지원하겠다고 했다가 임기말이 되면 ‘초당적 위치’로 돌아갔다. 퇴임 후에는 아예 정치와 담을 쌓는다. 여권 후보자는 임기말 대통령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5년 임기로 모든게 끝이고, 심판의 대상은 증발해 버린다.
노무현 정권도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정부는 지난달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면서 2007년까지는 적자재정이 불가피하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러면서 복지, 국방 예산은 대폭 늘렸다. 나라살림이나 가정살림이나 수입만큼 지출해야 하고, 수입이 줄면 긴축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임기 마지막해까지 미래의 국고를 앞당겨 펑펑 쓰겠다고 너무도 당당하게 발표했다. 급기야 경기 부양을 위해 국민연금 등 각종 연기금을 활용하겠다는 아이디어까지 나와 반발과 논란을 빚고 있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규정한 전쟁과 평화의 세대간 순환은 어느 분야에서든 적용될 수 있다. 한 세대의 비극적 경험의 영향은 다음 세대로 대체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아프레 무아, 르 들뤼주’ 평가를 받는다면 적어도 한세대 동안 합리적 진보세력의 집권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내 임기 5년 동안 내 소신대로 하고 깨끗이 물러나면 되지 않느냐’는 식은 곤란하다.
흑백논리, 정의의 독점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과 상대방 존중의 자세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향 평준화보다는 더 많은 일류를 지향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직 취임 2년도 안됐다고 하지만 레임덕등을 고려하면 적극적으로 일할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이용식 / 편집국 부국장 yslee@munhw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