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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재랭이'에서의 추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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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때 11월이었다. 우리집이 평택 읍에 있는 '재랭이'라는 동네로 이사갔을 때, 사택의 안채엔 먼저 온 교사가족이 살고 있었고 우리 차지는 바깥채에 붙은 방 한칸이었다. 안채엔 방이 두 개는 있었던 것 같았다.
안집 딸 둘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 세 학년 아래였다. 그 엄마는 우리 어머니와는 비교할 수 없이 멋쟁이로 보였고 딸들은 고급 털실로 짠 쉐타에 화사하고 예쁜 옷만 입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때 아마 처음 분가하여 돈이 없었던지 나에게 허연 무명실로 짠 싸구려 쉐터를 사입혔다. 그애들을 보다 내 모습을 보니 완전 촌뜨기였다. 어린 마음에도 속이 상하고 챙피했던 기억이다.
어느날 안집 딸들과 함께 놀았는데 한동네에 사는 다른 아이를 아주 나쁘게 말하는 걸 보고 그 아이에게 살짝 일러주었더니 큰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하기야 조그만 여자아이들 싸움이니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말싸움하는 것이었는데, 동네아이가 패거리를 몰고와서 싸우는 바람에 안채 아이들은 종당엔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난 그때 미련하게도 그렇게 큰 말싸움이 될 줄 몰랐다. 난 워낙 웬만한 소리를 들어도 싸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엄마가 바깥채인 우리 집에 와서 "니가 싸움 붙였다며?" 하며 심하게 야단을 쳤던 기억이 난다. 난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다만 안집 아이들의 험담이 부당하다는 생각때문이었는데......
그리고 현수네 집에 간 건 몇 달 후였다. 그 애의 집은 뜰이 넓고 나무가 많은 커다란 집이었다. 왜정시대에 지은 듯한 건물로 공직자의 관사인듯 했다. 아버지가 30대 중반의 젊고 가난한 교사였던 우리집에 비해 그애 아버지는 아마 40대 후반의 무슨 장(長)급의 공직자였던 것 같다. 그애도 아마 그 읍의 토박이가 아니고 공직자인 부친이 전근해 오면서 따라 왔을 거라는 생각이다.
현수! 그 애는 건강이 안좋은듯 한창 어린 12살 나이임에도 얼굴이 누렇고 병색이 있어 보였다. 방과 후에 우연히 그 애의 집에 가서 둘이 놀았는데 돌아올 때 고급스러워 보이는 연필 한타스와 공책과 화사한 색깔의 종이를 한아름 안겨 주었다.
시골에서 읍으로 전학 간지 몇 달 안되었던 나는 처음 보는 그런 선물들을 받고 잠시 황홀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현수와 부반장인 효선이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전날 현수가 효선이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것을 내가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난 단지 효선이에 대한 현수의 비난이 온당치 않다고 느꼈었고 비록 귀한 선물을 받았지만 그 말을 꼭 효선이에게 전해줘야 한다는 의분같은 것이 있었다.
딱정떼 같은 효선이에게 현수는 말싸움에서 지고 나서 내 옆을 지나가며 "니가 그랬지?" 하고 작은 소리로 딱 한마디만 했다. 그때 난 자신이 평소에 싸움을 안 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 싸움이 될 줄 몰랐고 현수에게 무척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는 군내 오르간 대회에서도 일등상을 탈만큼 예능에 소질이 있었고, 부잣집 딸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늘 조용하고 차분하고 점잖았다는 기억이다. 어디가 많이 아파서 그랬을까.
효선이는 부반장으로 남자같은 외모에 말괄량이에 골목대장이었다. 집에서는 가내공업으로 직조기를 돌리는 공방이 길에서도 보였다. 효선이는 촌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인 나를 왕따시키지 않고 항상 그들 무리에 끼워주었다. 방과 후에 집에 오면 사방치기 고무줄넘기로 늘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5학년이 다 끝나갈 무렵 통지표를 받고 다섯명이 우등상을 탔는데, 반장인 경숙이가 1등이었고 부반장인 효선이가 2등, 내가 3등이었고, 5등은 현수였다. 아직 나이도 어린 5학년 짜리 아이들이었음에도 현수가 무슨 5등에 우등상이냐고 수근대는 걸 들었다. 아마 국산사자 과목에선 점수가 안 좋았어도 워낙 음악 그림 글짓기에서 뛰어남을 보인 현수에게 선생님은 점수를 후하게 주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어느날 교무실에서 고함소리가 나더니 밖으로 뛰쳐나온 효선이 오빠가 담임선생님에게 욕을 해대는 걸 보았다. 효선이의 시험점수가 1등인데 2등을 주었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겨우 스무살짜리 처녀선생님이었는데..... 이건 여담이지만 먼 훗날 수십년이 지나서 그 선생님 정년퇴임식에 갔을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반장인 경숙이의 예능 실기 점수가 더 좋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사범학교를 나온 후에 처음으로 맡은 우리들이었고, 4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내리 3년동안 담임을 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나는 6학년이 되어 읍을 떠나 외가가 있는 시골로 이사 가게 되었다. 읍에서 한 오십리쯤 떨어진 시골이었다. 6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시골 중학교에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교사인 외숙모가 방학동안 읍에 가서 연수를 받으며 민박을 했던 집이 마침 전에 한 반 아이였던 벌통 치는 옥이네 집이었다. 어쩌다 우리 외숙모임을 알고 그 편에 편지를 보내왔는데 경숙이는 경기여중에, 효선이는 이화여중에 시험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옥이와의 소식도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십여 년 전에 우연히 경숙이를 비롯하여 십여명의 동창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개인적인 만남이 별로 없었던 경숙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니 그동안 스쳐간 친구가 좀 많았겠는가.
하긴 내가 그곳에 머문 기간은 방학을 빼면 일년정도 밖에 안되었으니 기억이 날 리 없다. 나에게 편지를 보냈던 옥이도 처음엔 나라는 존재를 단번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역시 대학을 나와 중학교에서 한동안 교편을 잡았었다니 그동안 스쳐간 친구며 제자가 또한 얼마나 많았겠는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이는 다섯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혀 모르는 몇 명이 용케도 5학년 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 친구들이 통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함께 놀이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효선이와 어린 나를 미안하게 만들었던 현수는 가장 소식이 궁금한 친구였는데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현수는 그곳이 객지라서 그렇다손 쳐도 효선이는 고향인데 아무도 그애 소식을 아는 친구가 없었다. 욕심도 많고 거칠었지만 내겐 참 기억나는 아이였는데....
문득 어린 날의 내 고자질로 싸움이 벌어졌던 두 번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묘한 기분에 빠진다. 재랭이에서 있었던 그 두번의 고자질 이후로 난 다시는 싸움을 붙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누구를 비방하던 그 비방이 아무리 부당한 것이라고 하여도 절대로 옮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옮기면 싸움이 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때 난 참 용감했다는 생각, 그르다고 생각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행동했던 그 두 번 같은 용기는 이제 사라지고 체면 따지고 뭐 따지고 하면서 말될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때의 용기가 어쩌면 철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나 계산하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소신대로 움직였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비겁한 나와 비교가 된다. 하긴 무던히 참아 넘기고, 앞뒤 계산하여 덮을 건 덮고, 짐짓 모르는 척하기도 하는 이 비겁함이 사실은 더 현명한 용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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