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씨의 선종 100일을 지내고
하루 한 번씩만 운다는 동생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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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년 시절까지만 해도 '삼년상'을 지내는 집들이 많았다. 초상(初喪)을 치른 이듬해 기일에 소상(小祥)을 치르고, 또 그 다음해 기일에 대상(大祥)을 치르고서야 탈상(脫喪)을 하는 그 오랜 관습이 6,70년대에도 거의 보편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전까지 삼년상의 풍경을 정말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소상과 대상도 초상처럼 많은 사람들이 상가에 가서 문상을 하고 먹고 마시는 '잔치'를 함으로써 그것은 쉽게 확인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동네의 모든 걸인들이 애사와 경사를 막론하고 삼동네의 대사(大事)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제일 먼저 모여드는 풍경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삼년상 탈상이 차츰 이년상 탈상으로 변하는가 했더니, 언젠가부터는 '백일 탈상'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백일 제사'를 지내고 탈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일로부터 100일째 되는 날 상가에 문상을 가는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백일 탈상은 차츰 거의 보편적인 풍습이 되는 것 같았다. 또 백일 탈상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집안 사람들끼리만 조용히 지내는 것도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나도 1986년 선친께서 작고하신 후 백일 탈상을 선택했다. 100일 동안 선친께서 생전에 기거하셨던 방 안에 조그만 상을 놓고 그 상 위에 선친의 영정을 모셨다. 또 상 옆의 벽에는 선친께서 생전에 즐겨 입으셨던 한복 저고리를 걸어놓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올렸다. 또 매일같이 어머니와 함께 연도를 바쳤다.
어머니와 함께 매일같이 연도를 바치고 또 한 달에 한 번씩(월초에) 성당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하면서도 집의 방 안에 100일 동안 항시적으로 상을 놓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드리고 했으니, 그것을 보면 나도 어느 정도는 알게 모르게 유교적 관습에 젖어 살았던 듯싶다.
(나는 사실 어느 면으로는 꽤나 보수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어서 유교적 관습의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을 내 생활 속에서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렇게 100일을 지낸 다음, 방에서 상을 치우고 벽에 걸었던 아버님의 한복 저고리도 개어서 농 안에 넣었다. 그것으로 탈상을 한 셈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어머니와 함께 매일 연도를 바치는 그 100일 동안의 정성이 사실은 꽤나 힘이 들었다. 그것을 마치고 나니 시원섭섭한 마음 한량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명료하면서도 아련하다.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그 백일 정성과 탈상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다시금 내 가슴을 질척하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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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5월 '성모의 밤' 행사 후에 성모상 앞에서 신부님과 함께
ⓒ 지요하
우리 생활 속에서 '백일 탈상'이라는 말도 이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 된 듯싶다. 대개는 장례를 치른 후 삼우제(三虞祭)를 지내는 것으로 모든 상례(喪禮)를 마감하는 것 같다. 삼우제도 원래는 장례 날 봉분을 한 후 묘 앞에서 지내는 초우(初虞), 다음날 지내는 재우(再虞)에 이어 세 번째 지내는 제사를 뜻하는 것인데, 지금은 장례 후 3일째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라는 인식이 거의 보편화된 것 같다.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묘 앞에서 삼우제를 지내는 것으로 탈상을 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된 오늘날의 제례 풍습 속에서도 불교 신자들은 여전히 '49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또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 중에도 49재를 지내는 이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만큼 불교가 오랜 세월 우리 생활 속에 끼치고 있는 영향은 크고도 깊다.
나는 지난해 12월 20일 내 가운데 제수씨가 이승을 하직했을 때 일찍부터 49재와 20년 전 아버님 작고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백일 탈상을 염두에 두었다. 일찌감치 49재 날과 100일째 되는 날을 달력에다 표시를 해놓았다.
12년 전 어머니 칠순 잔치 때의 불행한 일과 관련하여 제수씨의 병원비에 보태 쓰라고 1천만원을 가져오신 분의 '선행'에 깊이 감사하며 그 돈에서 100만원을 떼어 하느님께 바치면서 신부님께 49일 동안의 '위령미사'를 부탁드렸다.
그런데 내 제수씨의 영혼을 위한 연미사는 우리 성당에서 무려 60일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49재 날까지의 위령미사 이후에도 열흘 가까이나 연미사가 지속된 것은 누군지 모를 여러 은인들이 '강은실 요안나'를 위한 미사 봉헌을 청했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수시로 들어오는 강은실 요안나를 위한 미사 봉헌 요청을 받아놓았다가 49일 이후로 연이어서 미사를 지내신 것이었다.

▲ '빈자리'가 더욱 확연해지는 아픔을 안고 아이들의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입학을 기념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두 형제 가족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지요하
내 제수씨를 위한 연미사는 그것으로 그지치 않았다. 그 후에도 내 제수씨를 위한 연미사는 두 번이나 더 있었다. 우리 가족은 평일 미사에 갔다가 뜻밖에도 미사 지향을 알리는 신부님의 목소리로 강은실 요안나의 이름을 듣고는 누군지 모를 은인께 감사하며 미사에 더욱 열중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내 가운데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의 영혼을 위해(또 우리 가족을 위해) 미사를 봉헌해 주신 누군지 모를 여러 은인들께 이 지면을 빌려서나마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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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30일)는 내 가운데 제수씨가 이승을 하직한 후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일찍부터 이 달 30일이 제수씨 선종 100일임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나름대로 백일 탈상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100일째 날 제수씨에게 줄 '선물'을 궁리한 끝에 전날 저녁 동생과 의논을 했다.
지금 거의 완공 단계에 있는 우리 성당의 새 성전에는 도합 64개의 '성인상'이 필요하다. 64개의 성인상들이 이층의 안쪽 발코니에 빙 둘러 세워지게 되니, 우리 성당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성인상들을 모신 성당이 되고, 수많은 성인들이 성전 내부를 호위하는 모습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과 수많은 성인들이 함께 미사를 지내는 분위기를 지니게 된다.
성전 건립 기금 성격이 포함된 연유로 그 성인상의 하나 값은 300만원이다. 나는 우리 태안천주교회의 최초 신자이면서 초창기의 가장 큰 공로자인 선친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선친의 이름으로 선친의 주보 성인이신 '안셀모' 성인상을 봉헌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동생에게는 강은실 요안나의 이름으로 '요안나' 성녀상을 봉헌하라고 했다. 선종 100을 맞는 아내에게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이런저런 슬프고 괴로운 마음 사정에다가 바쁜 근무 조건이 맞물려서 신앙 생활을 기피하면서도 동생은 고맙게도 새 성전에 요안나상을 봉헌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이내 응락을 했다. 하늘나라의 아내에게 지상의 남편으로서 백일 선물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역력한 것 같았다.
나는 30일 아침에 신부님께 전화를 걸어 오늘이 제수씨 선종 100일임을 알려 드리고, 아버님과 제수씨의 이름으로 안셀모상과 요안나상을 봉헌하기로 했음을 말씀드렸다. 제수씨 선종 100일을 맞아 시아버지와 며느리, 두 영혼에게 좋은 선물을 하게 돼서 기쁘다는 말도 했다.

▲ 대전의 막내 동생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태안의 친형제나 다름없는 두 집 아이들이 중.고.대 입학 기념 촬영을 했다
ⓒ 지요하
30일은 목요일로 오전에 여성 레지오 쁘레시디움들의 주회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레지오 주회에 가시는 어머니께 부탁했다. 어머니가 참여하시는 레지오 쁘레시디움 할머니들이 주회 후에 모두 함께 묘소에 가서 연도를 해주신다면 내 차로 모시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내 차를 가지고 성당에 가서 모두 여덟 분의 할머니를 모시고 묘소에 갈 수 있었다. 묘소에 가면서 꽃집에 들러 미리 전화로 부탁한 꽃다발을 찾아서 가지고 갔다.
제수씨 묘에 꽃다발을 놓고, 할머니들과 묘 앞에 앉아 연도를 했다. 연도를 마치고 성가를 부를 때는 어머니와 몇 분 할머니들이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눈물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여러 할머니들의 눈물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묘소에까지 와서 연도를 해주신 할머니들께 점심 대접을 해야 백일 제례의 격식이 제대로 갖추어질 터였다. 예로부터 우리는 초상을 치르면서도 먹고 마시는 '잔치'를 하고, 제례를 지내고 나서는 음복을 하지 않았던가. 음복을 제대로 해야 제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던가. 천주교의 미사에서도 일종의 잔치인 '성찬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할머니들을 가까운 음식점으로 모시고 가서 점심 대접을 했다. 제수씨 백일 제례의 중요 부분인 음복을 하는 것이니 맛있게 잘 잡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 며느리를 앞세운 슬픔을 안고 둘째 며느리의 묘 앞에서 기도를 하시는 어머니
ⓒ 지요하
저녁에는 어머니와 우리 부부, 그리고 규빈이가 미사에 참례하고 제수씨를 위한 연미사를 봉헌했다.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미사의 지향을 알리면서 오늘이 강은실 요안나의 선종 100일임을 확실하게 말해 주셨다. 원래 목요일은 오전에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미사를 지내는데, 요즘은 판공(辦功) 때라 저녁에 미사를 지내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는 적이 다행이었다.
동생은 일터에서 늦게 돌아오고, 규왕이도 학원에서 8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므로 미사에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두 부자에게 저녁을 차려주는 일로 저녁미사 참례를 포기하고 사시는 어머니도 이 날은 저녁미사에 참례하셨다. 세상 떠난 둘째 며느리의 선종 100일 연미사만큼은 꼭 참례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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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또 한번 아내의 묘소에 가서 기도를 하고 돌아올 때였다.
"규왕엄마가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했으면 뇌혈관 기형을 일찍 발견하고 조기에 처리를 해서 오래 살게 되었을지도 몰라요."
동생은 울먹이며 그런 말을 했다. 아내에게 뇌출혈 전조 증상이 왔을 때 그것을 간과했던 자신의 실책이 뼈저리도록 후회스러운 탓이었다. 동생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오래 지니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그때 처음 했다.
며칠 전에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저녁식사를 하며 또 한번 소리없이 눈물을 닦고 나서 너털웃음과 함께 한 말이었다.
"하루에 세 번씩은 울고 살았는데, 이제는 하루 한 번씩만 우는 것 같아요. 어젯밤에는 처음으로 꿈에서 규왕엄마를 보았어요. 잠을 깼을 때, 꿈에 규왕엄마를 본 것이 어찌나 기분 좋은지…. 너무 기분이 좋은데도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꿈에서 본 아내 생각을 줄곧 한 탓에 아침에 출근을 할 때 단속 카메라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수없이 지나다닌 길이어서 거의 자동적으로 속도를 줄이게 되는 지점인데도 카메라에 찍혔다고 했다. 카메라에 찍힌 것을 느낀 순간 그러나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더라고 했다. 기분 나빠하면 아내에게 미안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고….
엊그제 밤에는 규빈이도 꿈속에서 엄마를 본 모양이었다. 엄마와 손을 잡고 어디를 함께 가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섭섭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어린 것이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목소리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엄마 목소리가 잘 생각나지 않아서, 더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제수씨의 목소리를 미처 녹음해놓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일찍이 비디오 카메라를 구입해놓았으면서도 왜 그것을 가족 행사 때 사용하지 않았을까! 속으로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서른 아홉 젊은 나이로 100일 전에 세상을 뜬 강은실 요안나의 묘 앞에서 연도를 하며 몇 분 할머니들은 눈물을 흘리고...
ⓒ 지요하
시간은 쉬임없이 흘러서 내 가운데 제수씨가 이승을 떠난 후로 벌써 100일이 흘렀다. 시간은 계속 하염없이 흐르고 쌓여서, 우리 가족들에게도 차츰 이런저런 변화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하루 한 번씩만 운다는 동생의 눈물도 마를 날이 올 것이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야 늘 천지 사방 어디에나 있겠지만….
규왕이는 어젯밤에 게임이 아닌 숙제를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얻어 거실 큰 아빠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 검색 숙제를 마친 녀석은 '내 그림' 안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 엄마의 모습이 있는 사진을 찾아서 열어보고 있었다. 녀석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녀석 나름대로 엄마의 선종 100일을 지내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차피 흐르는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또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하면서….
2006-03-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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