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억될 두 번의 시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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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부터 시 외우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시들을 모두 외웠던 것 같다. 지금도 내가 애송하는 시들 중에는 고등학생 시절에 외운 시들이 많다. 김광섭의 '내 마음',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노천명의 '푸른 오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유치환의 '깃발', 이육사의 '광야'와 '황야' 등등….
본격적으로 시 외우기를 한 때는 군대 시절, 베트남 전장에서였다. 베트남에서는 고국 부대와 달리 자유시간이 많았다. 작전 때를 제외하고 기지 안에 있을 때는 경계 근무나 하고 가끔 총기 손질이나 하면서 빈둥빈둥 노는 게 일이었다. 그 시간을 활용하여 처음에는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시절에, 월남에 간 덕분에 참 많은 독서를 했다. 그때 시도 많이 읽게 되면서 어느 날부터 시 외우는 일을 시작했다.
의미 전달이 쉽고 외우기도 낭송하기도 좋은 시를 골라서 외우되, 100편을 채우기로 했다. 이미 고등학생 시절에 외운 시들도 상당수 있어서 70편 정도를 새로 외우니 100편이 채워졌다. 정말 나는 그 시절에 100편의 시를 외울 수가 있었다.
나는 참으로 시를 사랑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외우고 있는 시들을 낭송하는 일을 즐겼다. 도깨비 연대 1대대본부 영내의 각 막사들에서는 종종 저녁에 귀국 장병 송별 회식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어느 막사에서 귀국 장병 송별 회식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저녁에 그 막사를 찾아가곤 했다. 그 막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불청객이면서도 호기롭게 끼어 앉아서 양껏 맥주를 얻어 마셨다. 그러고는 답례로 시낭송을 해주었다.
일단은 맥주를 얻어 마시러 온 칙칙한 꼴이었지만, 그리고 불청객의 출현에 뜨악한 표정을 짓는 '도깨비'들도 있었지만, 내가 암송으로 시낭송을 해주면 모두 하나같이 감동을 했다. 고국을 떠나 이국의 전쟁터에 와 있는 청년 군바리들에게는 시낭송이 양질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면서도 깊은 위안을 주는 것일 터였다.
나는 곧 부대 내의 '명물'이 되었다. 굳이 정보를 입수하고 귀국 장병 송별 회식이 열리는 막사를 넉살을 발휘하여 칙칙하게 찾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송별 회식 자리에 와서 같이 맥주 마시고 시낭송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참으로 즐겁고도 보람 있는 시절이었다.
긴긴밤 몇 시간씩 경계 근무를 할 때마다 나는 혼자 조용히 시를 읊으며 지루함을 달래곤 했다. 그것은 고국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월남에서 돌아와서 남은 군대 생활 5개월을 최전방 철책선에서 보낼 때, 분대장 노릇을 하느라 긴 교통호를 밤새 오르락내리락 할 때는 잠복호 근무병들의 졸음을 막아주고 위로를 해줄 겸 조용히 시를 들려주곤 했다.
시낭송과 관련하여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밴드가 있는 술집에서 시낭송을 하곤 한 일이다. 젊은 시절 제법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면서 종종 밴드가 있는 술집을 가곤 했다. 노래를 하려면 미리 곡목 신청을 해야 했고, 밴드에게 반주료를 선불로 지불해야 했다. 나는 곡목은 적지 않고 그냥 신청만 해놓았다가 차례가 되어 나가서는 밴드에게 시낭송을 할 뜻을 말하고 배음을 부탁했다.
나는 시낭송을 할 때마다 "이런 자리에도 시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리에도 시가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색다른 감흥을 안겨주고, 우리 가슴을 좀더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라는 멘트를 하곤 했다.
넓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술집이었다. 그런 술집에서도 나는 시낭송을 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기운이 없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내 시낭송을 경청하며 대개는 감동을 했고, 박수를 보내며 앙코르를 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이 얘기는 1987년 <여성자신>이라는 여성지 9월호에 쓴 '시를 외우는 마음'이라는 수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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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처음 노래방에서 시낭송을 듣는 '행운'을 누린 공주사대부고 제15회 동기들
ⓒ 지요하
젊은 시절 무려 100편이나 외웠던 시들은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점점 유실되고 이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시들은 30여 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때 애송했던 시들을 잊어먹어서 이제는 낭송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묘한 아쉬움과 비애를 갖게 한다.
그래도 30여 편 정도 남은 시들을 애써 챙기며 종종 혼자 즐기기도 하고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시낭송을 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지난해 3월(벌써 일년 전인가…) 서울 동대문문화원의 '문화답사' 행사에 참가하여 '매화축제'가 열리는 전남 광양을 가고 오면서 버스 안에서 여러 편의 시를 낭송한 일을 들 수 있다.
또 지난해 봄 '동대문학회'에서 연 '동대문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하여 시낭송을 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그 두 번의 행사에 나를 초대하여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시낭송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주신 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 권태하 작가님께 감사하는 마음 크다.
천주교 관련 웹사이트들 중에 '가톨릭 굿 뉴스'라는 사이트가 있다. 그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 다수가 3년 전부터 '굿자만사(굿 뉴스 자유게시판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있다. 일정한 규약이나 조직도 없이 그냥 간헐적으로 모임을 갖다가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는데, 나는 그 모임에 가면 으레 시낭송을 한다. 모두들 내 시낭송을 좋아하는 탓이다. 주변에 내 시낭송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두고 산다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일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지난 22일(토요일) 저녁 공주 계룡산 갑사 근처의 한 노래방에서 무려 세 편의 시를 낭송하며 모처럼 만에 색다른 행복감을 맛보았다. 아내의 모교인 공주사대부고 제15회 동창 모임에 또 한번 동행을 한 덕이었고, 노래방까지 따라간 덕이었다.
노래방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오래 전부터 구면인 박연숙(여) 교수가 내게 목록집을 갖다 주며 노래를 권했다. 나는 박 교수에게 먼저 시낭송부터 하고 싶다고 했다. 박 교수는 손수 내 차례를 예약해 놓았다가 차례가 오자 음악을 끄고 마이크를 잡고는 모두에게 내 시낭송을 알렸다.
나는 마이크를 받아들고 먼저 이런 멘트를 했다.

▲ 내가 노래방에서 시낭송을 하기 전 멘트를 하자 "누구는 그렇게 안 허구 사는 줄 아나”라는 농담으로 폭소를 유발하여 자리를 한결 재미있게 만든 아내의 남자 고교 동기 분
ⓒ 지요하
"이런 노래방에도 시가 존재한다면 더욱 뜻있고 좋은 자리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년 시절 한때 우리의 모국어로 빚어진 아름다운 시들을 100수나 외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과 함께 거의 잊어먹고 지금은 30편 정도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 시들을 지금도 종종 즐기며 삽니다. 먼 길 운전을 할 때 옆에 앉은 아내에게 들려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읊기를 합니다. 그러면 제 집사람이 참 좋아합니다. 남편의 시낭송을 좋아하는 마누라를 두고 사는 것도 행복이지 싶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누구는 그렇게 안 허고 사는 줄 아나."
그러자 노래방 안은 폭소가 터졌다. 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도 하지 않고 춤도 추지 않고 손뼉도 치지 않고 오로지 구경만 하는 듯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이 폭소를 유발하는 그런 농담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경이롭기도 했다.
곧 장내가 조용해지고 모두들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잡아주었으므로, 나는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시낭송을 시작했다. 먼저 김광섭님의 '내 마음'을 읊고, 홍윤숙님의 '장식론'을 낭송했다. 처음에는 이 두 편만 낭송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앙코르 요청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형기님의 '낙화'를 들려주었다.
노래방에서 시를 읊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그것은 모두에게도 난생 처음의 경험일 터였다. 초등학교 교감이시라는 분은 자신이 고교 시절 문예반장을 했다며, 좋은 감동을 선사해 주어서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캔맥주로 목을 축이며 오늘 노래방에서의 시낭송이 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시낭송을 할 수 있도록 선도 역할을 해주신 박연숙 교수와 노래방에서 내 시낭송을 감상하며 참으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내 가슴에 실로 충만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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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 시인 홍윤숙 선생님, 소설가 안영 선배님과 함께 우리 집 모녀는 사진도 찍고
ⓒ 지요하
23일 낮에는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성지(김대건 신부 탄생지)'에 몸을 놓을 수 있었다. '한국가톨릭문인협회'의 성지순례 행사 덕이었다. 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공주 계룡산에서 아내의 고교 동창들과 일찍 헤어져야 했다.
그 동안은 지방에서 산다는 핑계로 가톨릭문인협회의 이런저런 행사에 거의 참석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웃 동네인 당진군 우강면 솔뫼 성지에서 갖는 행사까지 외면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 행사에는 40명 정도가 참가했다고 했다. 버스 한 대로 왔는데 좌석이 여러 개나 남았다고 해서, 지난주 금요일 서울에서 내려와 어제부터 동행을 하고 있는 딸아이를 그 버스에 태워서 보내기로 했다.
이번 성지 순례 행사에도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지도신부이신 조광호 신부님이 동행하신 것을 볼 수 있었다. 글도 쓰시고 그림도 그리시며, 예술 쪽에 각별한 재능과 식견을 가지신 조 신부님을 뵙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1996년 겨울 '한국가톨릭문우회'가 홍콩과 마카오와 신천을 도는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동행을 했던 기억은 참으로 또렷하다.
조 신부님과 10년 전의 그 기억을 나누며, 그때가 벌써 10년 전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세월 빠름을 절감한다는 말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일행 중에는 원로 시인 홍윤숙님도 계셨다. 노쇠하셔서 기동이 어려우신 것 같았다. 여성 소설가 안영 선배님께서 늘 곁에 붙어서 부축을 해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홍윤숙님의 '장식론'이라는 시를 무척 좋아하는 아내는 홍윤숙 시인을 뵙고 인사를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딸아이는 정호승 시인을 뵙게 된 것이 더 기쁜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교우 문인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성지 곳곳을 찬찬히 살펴보고, '십자가의 길' 기도도 함께 했다.
원래는 당진군 석문면 장고항으로 가서 '실치회'를 맛볼 예정이었으나 비도 오고, 전화를 해보니 횟집 사정도 여의치 않다고 해서 일행은 오후 3시경 곧장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행이 서울로 떠나기 직전 나는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이신 김형영 시인의 권유로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을 할 수 있었다.
그렇고 그런 인사말 끝에 나는 순간적으로 버스 앞쪽 좌석에 앉아 계시는 홍윤숙 시인님을 의식했다. 인사말 중에 어젯밤 공주 계룡산 갑사 근처의 한 노래방에서 시낭송을 했는데, 홍윤숙 선생님의 '장식론'도 낭송했노라는 말을 한 참이었다. 나는 일순 홍윤숙 선생님의 시 '장식론'을 낭송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솔뫼 성지 순례를 함께 한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원들
ⓒ 지요하
나는 또 한번 어젯밤 계룡산 갑사 근처 노래방에서 했던 말과 똑 같은 멘트를 했고, 부연 설명으로 이런 말을 했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30여 편의 애송시들 중에서도 실은 홍윤숙 선생님의 '장식론'을 가장 좋아합니다. 저도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고 어떤 성찰을 갖게 해주는 이 시를 더욱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럼, 홍윤숙 선생님의 시 '장식론'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시를 읊으며 버스 안의 모든 이가 감동하고 또는 놀라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낭송을 마치고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려올 때 홍윤숙 성생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의 노안(老顔)에는 기쁘고 행복한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든을 넘기신 홍윤숙 선생님의 마른 손을 잡으면서 내가 오늘 노 시인께 참으로 좋은 선물을 안겨 드렸다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참으로 기쁜 마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내에게 홍윤숙님의 시 '장식론'을 들려주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여기에도 그 시를 소개해 본다.
장식론
- 홍윤숙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 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 가기 때문이다
씻은 무 같다던가
뛰는 생선 같다던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 보면
쇼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 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2006-04-2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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