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그리운 선생님 |
|---|
|
시골에서 자란 저가 국민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두가 힘들고 어렵게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벤또’라고 불렀던 도시락 그릇이 집안에 하나 밖에 없어서 형님한테만 주어지고 동생인 나는 놋그릇 주발에 흰쌀이 듬성듬성한 보리밥을 담고 그 위 한 귀퉁이에, 종지에 고추 찐 것과 가끔은 수루매 라고 불렀던 마른 오징어나 명태포 무친 것을 반찬으로 담아 보자기에 싸서 들고 학교에 다녔더랬습니다. 책가방은 1학년 때 '란도셀'이라고 해서 서울 삼촌이 사준 것을 너덜너덜 떨어질 때까지 어깨에 맨 적이 잠시 있었지만 그후로는 다른 아이들처럼 책과 공책, 그리고 필통을 책보에 싸서 허리춤에 질끈 동여매고 학교에 다녔던 그때 그 시절..... 필통 속에 연필이 내 걸음 속도에 박자를 맞춰서 달가닥 달가닥 소리를 내던 신작로길이 머리 속에 아련하게 그려집니다.
남자 반. 하나 . 여자 반, 하나 , 6학년은 달랑 2학급뿐이었지만 담임선생님은 몇 안 되는 중학교 진학지망생 들을 위해 어둑어둑할 때까지 수험공부를 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방학 때에도 다른 학년 선생님은 다 쉬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담임선생님은 남녀 합하여 겨우 10여명이 조금 넘는 중학교 진학생을 위해 본인의 휴가를 반납하시고 매일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런다고 학교 월사금 외에 별도의 과외수업비를 내는 일도 없었고 누구 한사람, 선생님 수고하신다고 요새 말로 촌지 봉투를 갖다 드리는 학부모님도 없었습니다. 겨우 농촌에서 수확한 팥이나 콩 몇 되 가져 오는 이도 한 둘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학시험은 주로 3월 초에 있었고 입학식은 4월초였던 걸로 기억 됩니다. 그 시절은 왜 그렇게 추웠던지. 교실에 나무를 때는 난로가 있었지만 몇 안 되는 사람을 위해 비싼 장작을 땔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겨울방학 동안 선생님께서는 서울이나 대구 등 대처에 있는 중학교를 가고자 하는 몇몇 학생은 선생님 댁으로 오라 하여 그곳에서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선생님네 아가 들도 있는데 비좁은 안방에서 북적거리는 것이 죄송스러워 윗방인 다다미방으로 옮겨서 성근 나무상자에 백열등을 집어넣은 것을 이불 속에 집어넣고 우리는 그 상자 위에 서로 발을 얹기 위해 밀고 차고 하면서 추위를 이겨가며 공부를 했습니다. 입학원서를 쓰고 드디어 시험을 보기 위해 학교를 떠나던 날 선생님은 마치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안쓰럽고 비장한 표정으로 우리 들 손에 일일이 손에 봉투 하나씩을 쥐어주셨습니다. “너 하나 만은 분명히 합격할 것이라 믿는다. 쉬운 것부터 풀어라. 답안지에 이름 쓰는 것 잊지 마라.(실은 전에 시험지에 이름 쓰는 걸 저가 까먹은 적이 있었거든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차비에 보태써라” 집으로 오는 길 도중에 몰래 그 봉투를 열었다가 얼마나 눈물이 나든지..... (나중에 알고 보니 저만 그렇게 써주신 것도 아니고 저만 차표 값을 보태라 하신 것도 아니었더군요.)
이제는 저 세상에 가신 깁갑동 선생님. 그때 대구로 간 두 학생 중 하나는 이 나라의 검찰총장을 역임했고. 또 한명은 미국 택사스 덴버 교민회장을 했고, 서울로 진학한 학생 3명 중 대학교수 1명(여자). 노동부 국장(이사관) 은퇴.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저이지만 ‘스승의 날’이 오면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이렇게 선생님을 그리워한답니다. 선생님!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
| 99501 | 아내가 주인인 새 집의 '등기권리증'을 받고|18| | 2006-05-15 | 지요하 |
| 99500 | 호주에 야생낙타가 20여만 마리나 살아 ???|5| | 2006-05-15 | 배봉균 |
| 99499 | 그리운 선생님|26| | 2006-05-15 | 권태하 |
| 99498 |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2006-05-15 | 주병순 |
| 99497 | 소철의 부활 | 2006-05-15 | 최희정 |




게시판 운영원칙
Help Des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