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8일 (목)
(녹)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자유게시판

Re : 한국 천주교회사 증언 현석문 가롤로

스크랩 인쇄

배봉균 [baeyoakim] 쪽지 캡슐

2006-05-29 ㅣ No.99992

한국 천주교회사 증언 현석문 가롤로 - 신희상

 

 

한국 천주교회사 증언 현석문 가롤로 

순교자 열전 '기해일기' 집필
한국인 聖人탄생에 결정적 역할
 현석문 성인의 영정
한국 천주교회 초기 신자이자 순교자인 현석문(玄錫文)의 세례명은 가롤로이다. 그는 1797년 서울에서 역관(譯官)이었던 계흠(啓欽)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4살 때인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아버지가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후 현석문은 3살 손위 누이인 경련(敬蓮, 1794∼1839)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신심을 굳게 키우며 성장했다. 신유교난때 순교한 최창현의 아들과 17세때 결혼한 누님이 불과 3년만에 병으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 삯바느질로 살림을 도왔고, 장성한 현석문은 약국을 차려 생계를 이어갔으며, 결혼한 후에도 온가족이 함께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다.

현석문은 교난으로 인해 흩어진 교회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특히 그는 이경언(이순이 루갈다의 막내동생),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과 자주 어울리며 초기 천주교회를 발전시켰다. 1831년 12월 현석문은 유진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 중국 땅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현석문은 1836년 5월에 입국한 샤스탕(Chastan, J.) 신부의 수행 복사(服事)가 되어 전국 각지의 공소를 순회하면서 그의 성무를 돕는 한편 신입교우들의 전교와 신앙지도에 전념하였고, 1837년 말에는 앵베르(Imbert, L.M.) 주교가 국내로 무사히 입국하는 일을 주도하여 성사시켰다.

1838년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현석문은 포도청에 자수하여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자 했으나 선교사와 교우들이 적극 만류했다. 특히 앵베르 주교는 관헌에 체포돼 세상을 떠나기 전 조선교회를 그에게 맡겼는데, 당시 주교와 교우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현석문은 이재영(李在永)이라는 가명으로 숨어다니며 어렵게 살아남은 교인들을 격려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었으며, 그들을 포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이주시켜 후일을 도모했다.

 

누님·아내·아들의 옥사·순교 지켜봐

기해년(1839년) 초에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의 박해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사람은 천주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였다. 기해교난때 잡혀 들어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혹독한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며 용감하게 죽음의 길을 택하자, 이를 전해들은 앵베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앵베르 주교는 1월 16일 박해의 발단으로 부터 자신이 수원으로 피신하는 5월말까지 보고 들은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전기를 각종 증거를 중심으로 상세하게 기록했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문헌은 1842년 의주 국경에서 김방지거를 통해 당시 마카오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김대건에게 전달되었고,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소장돼 있다.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체포된 뒤에도 그런 기록이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하상과 현석문 등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순교일기를 계속 작성하는 일을 완수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누님, 아내 데레사, 아들 은석이 차례로 옥사 내지 순교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신앙 동지였던 정하상마저 관헌에 체포돼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혼자 살아남은 현석문은 호서지방의 깊은 산 속에서 분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혈육과 동지를 모두 잃은 외로움과 적막함을 신앙심으로 이겨내야 했다.

박해가 잠시 멈추자 현석문은 최희원(崔希遠), 모방(Maubant, P.) 신부의 복사였던 최형(崔炯), 이승훈의 손자 재의(在誼) 등의 협조를 얻어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사실을 수집하였고, 이를 다시 확인하고 보충하여 무려 3년에 걸쳐 ‘기해일기’라는 ‘순교자 열전’을 완성했다. 그는 ‘순교자 열전’을 기록할 때마다 항상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 거룩한 일이 단 한줄의 잘못도 없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하게 빌었다. 당시 그는 목욕재계하고 오랫동안 기도한 후에 이 일에 착수하였는데, 자신과 함께 신앙을 지키다 생명을 바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간 선교사들과 수많은 교우들 특히 누님과 아내와 자식의 생전 모습을 절실한 그리움으로 떠올리며 피눈물을 흘리며 적어나갔다고 한다.

이 ‘기해일기(己亥日記)’는 1839년의 기해교난을 전후하여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순교기록서로서 순교자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에 기초하여 쓰여진 책이다.

그후 현석문은 1845년 4월말 김대건 부제가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중국으로 다시 건너갈 때 최형 등 교우 11명과 함께 배를 타고 동행했다. 이때 폭풍우를 만나 망망대해에서 거의 탈진한 상태로 조선을 떠난지 28일만에 마침내 중국 상해에 닿았다. 1845년 8월 김대건은 금가항(金家港) 경당(經堂)에서 페레올(Ferreol, J.J.J.B.) 주교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10월에 현석문 일행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라파엘’이라 이름을 지은 작은 조선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또다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천신만고 끝에 익산에 닿았다.

그후 김대건 신부가 서울에 돌아와서 교인들의 집회장소로 사들인 집을 현석문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명의로 등기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들의 해상을 통한 입국경로를 탐색하던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었고, 그의 체포소식을 들은 현석문은 그때까지 거처하고 있던 집을 버리고 새로 집 한채를 사서 교회의 돈과 물건을 옮겨 훗날을 대비했다. 며칠후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려고 이전 집을 습격했지만 그의 행방을 찾을수 없었다. 그런데 이사할 때 거들어준 짐꾼들의 진술로 그의 거처가 알려져, 현석문은 1846년 7월 11일에 정철염, 우술임, 김임이 등의 여교우들과 함께 체포됐다.

새남터서 효수…1984년성인품에

김대건 신부가 처형된 사흘후인 그해 9월 19일 현석문은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했다. 이후 그는 1925년에 복자(福者)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성인품에 올려졌다.

한편 앵베르의 후임으로 1845년 10월말 입국한 페레올 주교가 ‘기해일기’의 내용을 다시 검토하여 기록의 정확성을 기했고, 1846년에 일어난 이른바 병오교난(丙午敎難)으로 희생된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의 전기와 순교사적까지 추가로 기록했다. 이 작업에 최양업 신부가 자료수집과 사실 확인을 도왔으며, 페레올이 프랑스어로 기록한 것을 라틴어로 옮겼다. 그후 ‘기해일기’는 제8대 조선교구장이 된 뮈텔(G.C.M. Mutel) 주교에 의해 1905년 출판되기 까지 약 60년간 필사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이 책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오래된 책이고, 최초의 기록이며, 이로 말미암아 순교자들의 사적에 대한 수집과 정리가 계속 추진될 수 있었다. 특히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로마교황청의 순교 시복 심사때 핵심적 자료로 활용돼 1925년 시복(諡福)된 한국천주교인 79위 복자(福者)의 시복 절차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기해일기’는 한국천주교사에서 고유하고도 절대적인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현석문은 전생애를 선교사와 교우들을 도와주는 일에 바쳤던 인물로서, 교황청 조서에 ‘공적이 많고 덕이 높으며, 성격이 온화하고 상냥하며 솔직한 사람’이라고 특기되어있을 정도다. 또한 그는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초기 한국천주교회가 박해의 고난을 넘어 재건, 발전하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기록한 ‘기해일기’를 남겨 수많은 순교자의 거룩한 피로써 건설된 한국 천주교회사의 위대한 증언자이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수많은 한국인 천주교 성인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교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천주교 신앙의 시금석을 남긴 것이다.

 

 

김 탁〈철학박사〉

 

 

 

 

 

최미정(NATALIA99) (2005/04/20) : 성가 61번~♬



31 3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