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한민족 조선천주교회 창립사
- 배달겨레가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운 간추린 이야기 - 변 기 영 신 부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성지
차 례
머리말 5
제 1 장 :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먼 준비
1. 한민족의 유래 : 천산 산맥에서부터 근역 삼천리까지 7
2. 천제교 민속신앙 생활시대 8
3. 외래종교문화의 수용 9
제 2 장 : 하느님을 찾는 배달겨레의 노력과 가까운 준비
4. 이 광이 소개한,『천주실의』와 『지봉유설』은 우리겨레에게
최초로 천학을 인식하게 하고, 실학 정신을 태동시켰다. 10
5. 허균이 바치던 천주교 기도문 12단과 홍길동전 11
6. 소현세자와 묵암 이경상이 데리고 온 중국인 천주교신자들 5명 12
7.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 생겼던 천주교신자들 13
8. 남경 교구장 중국인 라문조 주교가 고려 교구장서리 겸임 13
9. 상이한 시대와 장소에서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천주교신자들 14
제 3 장 : 광암 이벽성조의 천학연구와 실천 및 교회창립 활동
10. 조선천주교회는 광암 이벽성조와 10代 후반, 20대 초반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다. 15
11. "조선천주교회 창립자는 광암 이벽." - 성 Daveluy 주교 17
12. "이벽이 조선 신도회대표로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성 Maubant신부 19
13. "대성현 이벽이 저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승훈 20
14. "천학 연구에 탁월한 이벽박사가 이승훈을 북경에"- 금대건 신학생 21
15. "조선 천주학의 시조는 이벽이니," - 조선왕조실록 22
16. "이벽은 조선천주교의 시조다"- 이만채의 벽위편 23
17. "북경 천주당에 가서 기도서를 구하고 영세를 청하게."- 황사영 백서 23
18. "이승훈, 약용 3형제, 권일신 부자, 등이 이벽을 모시고 앉아서"
-벽위편 24
제4장 : 정약용의 문헌에 나타난 천진암과 광암 이벽성조
19.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갖춘 이벽" 24
20. "인간세계에 내려오신 신선나라의 학(鶴)과 같으신 광암 공에게서
우리는 신의 풍채를 보았었도다\" 26
21. 가을을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는(승추홀비거) 학처럼, 광암 공이 떠난 지
1주년, 전처럼 붉게 물든 천진암의 가을 단풍을 보러 가서. 26
22. "천진암엔 아직도 이벽의 독서처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27
23. 정조 임금이 낸 숙제 답안을 작성해주던 광암공의 문장이 적힌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던 정약용 28
제5장 : 광암 이벽 성조 조선천주교회 창립
24. 천진암에서 천학을 연구하고 수도한 광암 이벽성조의
조선천주교회 창립활동 31
25. 천진암의 이벽독서처와 강학당은 젊은 선비들의 천학도장이었다. 32
26. 엄동설한에도 천진암에서 10여일씩 강학회를 열던 젊은 선각자들 34
27. 천진암에 도우가 중도하니, 광암공은 성교요지를 하필하였다.
- 1837년 정학술의 이벽전 35
28. 엄동설한 심야에 광주산맥을 넘던 이벽성조의
천진암 강학회 참석열성 - 성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사 비망기』 36
29. 이벽성조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산 속 은둔처에서
천학 연구와 실천에 전념 39
30.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의 래력 41
31. 세례로 천주교신자가 되지 않고, 천주교신자라야 세례를 받는다. 43
32.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은 평신도들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46
33. 일본은 스페인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신부가,
중국은 이태리의 마테오 리치신부가 선교 49
제6장 : 천진암에서 시작된 조선천주교회가 수도 서울로 발전
34. 천진암에서 서울 수표동으로, 명례방으로, 마현으로, 양근으로 전파된
당시의 조선천주교회 50
제7장 : 조선천주교회가 최초로 겪는 을사년의 박해와 순교시
35. 조선천주교회 최초박해인 을사박해: 이벽성조 순교, 금범우 역관 류배
52
36. 제 살과 뼈를 태워 빛이 되어 남을 비추고, 천주께 제물이 되는
한 토막의 초와같이(천이지기한서동,일주심향서공화)- 이승훈 53
37. 권일신과 권철신의 순교 57
38. 이승훈, 정약종 성현들의 순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도 못 속에 있느니라(월락재천수상지진) - 이승훈성현 운명시 59
39. 광암 이벽성조의 순교 : 은하수 별자리에 둥근달 떠오르듯,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이벽성조운명시 62
40. 운명을 앞두고 이벽성조께서 읊으신 성시 64
41. 이벽성조 흠모시 68
42. 1785년에 문중과 가정의 박해로 32세에 순교하신 이벽성조의
장례식에 와서 25세의 정약용선생이 지은 만사 71
43.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세자 요한 광암 덕조 이벽 성조의 인적사항 72
제 8장 : 평신도로서 선의와 열성으로 사제직무까지 수행하던
조선천주교회 창립선조들
44.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들이 평신도들이면서도 선의와 열성으로 결성한
자발적인 림시준성직자단의 성무활동 76
제9장 : 한국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사제 양성
45. 평신도들로서 임시 준성직자단의 결성과 활동은 사제양성의 첫걸음 81
46. 김대건, 최양업, 최방지거, 세 소년들 그 이전에도
조선천주교회가 파견한 신학생들이 마카오와 요동에 있었다. 82
47. 이승훈 성현의 손자인 이재의 토마스(1807∼1868)와 정약종 성현의 아들 정하상은 김대건(1821∼1846), 최양업(1821∼1861) 신학생들보다 앞선 국내 선배 대신학생으로서 대품(차부제품) 직전이었다. 84
결 론
48. 자발적인 진리탐구와 실천 및 진리 수호와 증거의 자질을 타고난
민족정신 86
머리말
한뫼들이 솟기 전에 은하수가 흐르기 전에, 하늘나라님의 얼이 한가위겨레 품어,
별지는 샛녘 강산에 선동(仙童)이 빼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부러워 모셨네.
한겨레 한 스승 이벽성조, 한겨레 한 스승 이벽성조.
우리 배달겨레가 하느님을 섬기며 걸어온 길을, 까마득한 저 옛날까지 더듬어 올라가며, 오늘의 우리들 생활 속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 연구한 선인들의 각종 문헌과 자료들을 모으고 비교하며 종합하여, 좀 더 자세하고 길게 밝혀보는 일은 현재 준비중인, 『한민족 천주 신앙사』에서 보다 상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주로 2세기 전 광암 이벽성조께서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를 본거지로 하여, 10대 후반의 청소년 선비들과 함께 선교사나 성직자없이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우기 시작하던 이야기를 가급적 간결하게라도 우선 전하고자 한다.
특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대부분이 주로 프랑스 선교사 성 다불뤼(A.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사 비망록』자료를 국내 관청기록이나 박해자들의 기록으로 립증, 확인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이 책에는 그러한 문헌 자료들 뿐 아니라 그 후손들과 장소에 아직까지 묻어 있는 흔적들과 깃들어 있는 선조들의 체취와, 또 새로 찾은 부수러기 자료들을 종합하고 분석하며 대조하여 정리하고 있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앞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들이 정리되어 발행될 것이며, 이를 토대로 후학들의 손에 의해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내용들과 다른 여러 부분이 많이 추가되어, 보다 완벽한 한국천주교회창립사가 밝혀지고 쓰여지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한편, 200여년 전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던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 동안은, '대한제국'이라 하였었고, 또 '일본국'에 점령되어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 이름자체가 없어진 적도 있었으며, 지금은, '대한민국'이라고 부른다. 또한 북쪽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며, 고구려와 발해와 고조선의 옛 강토의 대부분은 지금 중국 영토가 되었고, 그중 일부는 '조선족자치구'로 불리우고 있는 지역도 있다. 앞으로는 또 어떻게 다르게 불리울지 모를 일이요, 걱정할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요즈음 중국의 고구려사 언급을 보면서 과거 역사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디서나 어느 시대나 누구나, 배달겨레이면 부담감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특히 한 시대의 국가조직 내에 있던 국민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라기보다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배달겨레 한민족의 정신적인 자질에 시선을 더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 준비중인 책을『배달겨레가 하느님을 섬기며 걸어온 길(한민족천주신앙사)』이라고 제목을 붙였고, 그 중에서, 우선, "배달겨레가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운 특이하고 기적적인 이야기(한민족의 천주교회 창립사)"를 발췌하고 간추려서 내놓는 것이다.
2004. 10. 14.
천진암 성지 에서 변기영 신부
제 1 장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먼 준비
하느님은 배달겨레에게 천주신앙의 정신적 자질을 특은으로 주셨다.
우리겨레는 하느님의 겨레다.
우리겨레는 먼 옛날부터 늘 하느님을 위하며 모시고 살아왔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겨레와 늘 함께 계시며, 우리겨레를 보우하시었으니,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겨레이다.
1. 한민족의 유래 : 천산 산맥에서부터 근역 삼천리까지
우리겨레는 천산 산맥에서부터 해돋는 나라 동쪽을 향하여 몇 만년 동안 오랜 세월을 두고 민족이동을 해왔다. 민족이동의 이유는 수렵하기 쉬운 곳을 찾아 나선 경제적인 것도 아니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곳을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것도 아니며, 하늘에 떠서 지나가는 해를 하느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해가 거하며 다스리는 저 높은 하늘을 우러러 위하면서,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가면, 해의 나라, 맑고 밝은 '빛의 나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겨레는 밝은 빛을 숭상하며 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저 멀리 만년설로 덮여 있던 선조들의 고향 천산 산맥을 뒤로 하며 떠나온 우리겨레는 부족의 경사나 큰 날에 자기네 종족을 표시하는 흰옷을 입었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여기던 산들을 신성한 곳으로 믿고, 조상이 죽으면 쉽게 하늘에 오르도록 산에다 묘를 쓰기 시작하였다.
한국학의 선구자들, 특히 『아시조선』등을 저술한 육당 최남선(1890∼1957)을 비롯한 학자들이 우리겨레의 고대사에 관하여 연구한 이러한 학설들은 우리겨레를 천신족으로 신성시하는 거룩한 사화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대략 일만년 전후를 해서 배달겨레는 지금의 한반도에 이르렀고, 자기들이 자리잡는 마을 이름도 빛고을(광주), 별고을(성주), 볕고을(양성), 밝은 고을(명주), 흰 고을(백성), 맑은 고을(청주), 빛나는 고을(화성),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즐겨하였다.
따라서 이 선사 시대 우리겨레 종족 중에는 호랑이, 곰, 독수리 같은 동물을 위하는 부족들도 있었지만, 산이나 강, 바다나 별, 달이나 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부족들이 많았고, 특히 해(日)와 하늘(天)에 대한 정성은 큰 나무나 동물이나 지상의 산이나 강물 공경과는 한 차원 높은 것이었다.
2. 천제교 민속신앙 생활시대
한울님을 위하던 우리겨레가 이 땅에 정착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 정신은, 더욱 정리되고 발전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특히 순수하고 소박하고 진솔하고 경건하게 생활화하여 왔다
지금부터 약 반만년 전쯤, 단군조선 시대를 전후하여서는 하늘 공경과 어른 공경, 족장 공경이나 나라님 공경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풍습화할 정도로 발달하여,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식이 지역을 따라 여기저기 발전하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관습은 보편적이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던 신앙으로서, 우리겨레의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소박하고 진솔한 한울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까지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민족신앙이 애국가에서도 불려지고 있듯이, 우리겨레의 마음 속에는 늘 하느님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겨레는 배타적이지 않고 마음이 넓어, 다른 나라 겨레들이 걸어온 구도의 길도 쉽게 받아들여 우리의 것과 합쳐서 새로운 우리의 것을 만들어 토착화하여가며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도 하였다.
3. 외래종교문화의 수용
불교와 유교와 도교와 그리스도교, 등, 다른 나라에서 시작된 여러 종교도 우리 선조들은 폭넓고 관대하게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 토착화하였다
네팔 룸비니에서 태어난 '샤카무니 꿔타마 싣다르타 부다'(B.C. 540∼480)의 가르침, 즉 불교가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에 이르는 불교문화의 찬란한 연꽃이 만발하게 되었고, 중국의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유교가 전해져서, 특히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온 백성들의 생활관습에 이르기까지 삼강오륜으로 례의범절이 확립되고, 제사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민속화한 한울님 공경 사상의 터전 위에서 중국과 인도 지역에서 시작된 이러한 세계적인 종교들과, 특히 근대에서야 우리겨레에게 전해진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종교정신문화가 우리겨레 안에 뿌리를 내리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며 풍요로운 결실을 내고 있다.
제 2 장
하느님을 찾는 배달겨레의 노력과 가까운 준비
4. 이 광이 소개한,『천주실의』와 『지봉유설』은 우리겨레에게 최초로 천학을 인식하게 하고, 실학 정신을 태동시켰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전파되어 있는 그리스도교가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선교사로 들어가 활동하므로써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 만이 선교사들의 발자욱이 나기 전에 우리겨레 스스로 천주교 책들을 외국에 나가서 가지고 들어와 읽고 연구한 후 시작하였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수사가 일본군을 위한 군종신부로 동행하여 남해안 지역 진해의 곰내(웅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병영 내에서,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면서, 약 6개월 정도 미사를 드리고 세례성사와 병자성사 등을 거행하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이 퇴각하면서 천주교신자들 대부분도 일본으로 이동되었고, 국내에는 천주교 신앙인들이 존속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전란 중에 3차에 걸쳐 지봉 이 광(1563∼1628)이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천주실록정문』을 가지고 와서 전하므로, 조선 선비들은 천주교를 서적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알기 시작하였고, 특히 지봉유설을 통하여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나아가 실학정신을 싹틔우는 계기가 마련되게 하였다.
이 실학태동의 계기를 16세기∼17세기로 대부분의 실학 연구서에서 전문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은 불가피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하겠다.
5. 허균이 바치던 천주교 기도문 12단과 홍길동전
그 후, 유교의 교육을 받고, 불교와 도교, 등 종교분야에 관심이 많던 허균(1569∼1618)은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천주교 기도문집인 12단을 가지고 와서 실천한, 최초의 천주교 기도문을 바친 신앙인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하여 조선사회 제도개혁에 대한 문제의식의 씨앗을 뿌렸으며, 훗날 우리나라 실학 형성에도 은연 중 밑거름이 되었으니, 유교의 현실 위에서 불교와 도교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이 문학작품은 한민족의 고유한 민족사상인 홍익인간의 정신적 바탕 위에서 융합된 것이라 하겠다.
6. 소현세자와 묵암 이경상이 데리고 온 중국인 천주교신자들 5명
또한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그 비서관 묵암 이경상(이벽성조의 직계5대 조부) 공이 북경의 동화문 가까이에 있던 동화관에 머물면서, 당시 북경에 와서 남당 천주교회를 짓고 거기에 주임신부로 있던 독일인 아담 샬 신부와 접촉하면서 천주교에 관하여 묻고 알아보며 친교를 맺었다. 그리고 1645년에 천주교 서적들과 특히 건상곤여도 등 기념품들을 선물로 받아가지고 귀국할 때 중국인 천주교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들어와, 한동안 대궐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 때 소현세자와 그 일행 중 일부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까지 받았는지, 혹은 받고도 비밀에 붙였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입국한 소현세자가 얼마 안가서 독살되므로써 함께 왔던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은 귀국조치되었다. 사실 소현세자 일행은 최초로 외국인 평신도 선교사 5명을 데리고 들어온 목적이 조선에 천주교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조정은 정적들의 당쟁으로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사고방식과 투쟁 속에 처해 있었다.
7.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 생겼던 천주교신자들
광암 이벽성조의 천학 연구와 실천 및 활약으로 조선천주교회가 창립되기 그 이전에도, 조선에는 이미 천주교신자들이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약간 있었다는 기록이 일성록(日省錄)과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 및 조선왕조실록 등에 단편적으로나마 조금씩 엿보이고 있다. 특히 이능화의 저서에서도 간결히 집약하였듯이, 인조, 효종, 숙종, 영조 시대에(1650∼1750) 이미 함경북도 두만강 주변과 황해도 서해안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없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천주"라는 단어를 종종 "천주"라고 표기한 곳들도 있으나, 그 종교의 내용을 보면 관리들이 "천주"를 잘못 쓰고 있을 뿐, 천주교를 말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소현세자 때 일시적으로 중국인 천주교신자들이 잠깐 와서 있다가 돌아갔듯이,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각자 개인들의 일시적 신앙행위로 그쳤을 뿐, 단체적인 조직으로 교회를 이루고, 대를 이어가는 신앙생활의 전승은 없었고 불가능한 처지였다.
8. 남경 교구장 중국인 라문조 주교가 고려 교구장서리 겸임
1674년 1월 로마교황 클레멘스 10세가 중국인 최초의 사제 나문조(Gregorio Lopez) 신부를 남경교구장으로 임명하면서 고려교구장을 겸임토록 인사발령하였는데, 이렇게까지 될 정도로 조선은 이미 로마 교황청에까지 천주교 전교 면에서도 알려져 있었으니, 16세기말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우리겨레의 복음화가 먼 준비기간을 거쳐 온 결과였다. 나문조 주교는 로마교황청에 조선선교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할만큼 관심이 많았었다. 그런데 교황청이나 남경천주교회의 이러한 안목과 움직임을 낳게 한 것은 조선 사신들과 선비들의 관심과 노력이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수광, 허균, 소현세자 일행, 등이 북경에 출입하면서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등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조선이 로마교황청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경교구장의 이러한 위치와 자격과 노력은 교회의 선교활동상의 시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역시 그 동안 우리겨레가 애써온 노력에 대한 로마 천주교회의 관심과 사목적 조치였고, 은총의 응답일 뿐이었다.
9. 상이한 시대와 장소에서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천주교신자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스페인 선교사와 일본인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했었고, 병자호란을 계기로 소현세자와 이경상 공이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수행 입국시켜 잠시 중국신자들이 국내 대궐에 체류했었으며, 남경교구장 라문조 주교가 조선교구장서리로서 조선선교를 계획하고 시도했었고, 그 외에도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서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이나 중국 천주교신자들과의 접촉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고, 나아가 입교까지 했었다하더라도, 이런 일련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그 당시의 몇 않되는 조선인 천주교신자들의 신앙은 산발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서, 입교의 계기나 조건이 없어지면 후대로 계승되지 않고, 단절되었다가 회생하지 않고, 얼마 안가서 거의 당대에 사라졌다.
즉, 임진왜란의 일본 점령군 부대가 철수하였다든가, 또는 정부에서 황해도 해주 지역이나 함경도 회령지역에 목사나 현령을 통하여 천주교 신봉 금지령을 내리자 비조직적이며 개별적이던 천주교 신앙생활은 바로 중단되고 사라졌으며, 남경교구의 라문조 주교가 사망하자 역시 조선선교계획은 무산되었다. 즉, 조선인들이 이러저러한 계기로 중국이나 일본과의 접촉선상에서 천주교신자들을 만나고 사귀고 입교도 하였으나, 하느님의 백성인 조직적 단체를 이루지 못하였고,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천주교회로 계승되지 못하였으며, 당대에 없어지고 말았다.
제 3 장
광암 이벽성조의 천학연구와 실천 및 교회창립 활동
10. 조선천주교회는 광암 이벽성조와 10代 후반, 20代 초반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벽성조를 중심으로 천진암에서 시작된 젊은 소년들의 천학 연구와 신앙 실천 및 전파운동은 갖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온갖 잔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이루는 뿌리가 되었으며, 조선의 사회개혁과 근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벽(1754∼1785), 이승훈(1756∼1801), 정약전(1758∼1816), 정약종(1760∼1801), 정약용(1762∼1836), 권철신(1736∼1801), 권일신(1742∼1792),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에 신명을 같이한 주역들이 당시 남인계에 속한 선비들이고, 성호 이익(1681∼1763), 순암 안정복(1712∼1791), 등 실학자들과 선후배 관계라 하여, 실학자들이 한국천주교회를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당시 천학이라고 부르던 천주교 신앙운동의 조직적인 출발은, "실학자"라는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어린 10대 후반의 소년들과 20대 초반의 청년들의 활약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특히 조선의 실학자들이 조선천주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서적구입, 기도문 암송, 등으로 입문에 기울어져 천주교를 학계에 알리고 연구하고 실천까지 시도하던 조선의 초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인사들, 나아가서 정신적으로는 입교예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선의 실학이 배태되기 시작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봉 이수광이나 허균, 소현세자, 이경상 공, 등의 천주교 서적 구입과 보급, 연구와 실천시도 등은 서양세계를 알리면서, 꽉 막혀 있던 조선사회 개혁의 문제의식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뒤를 이어 중국에 다녀오면서 천학 서적들을 가지고 들어와 연구하던 정두원이나 이 명, 또 이를 비판적으로 보던 신후담, 훗날의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 권철신, 권일신,이벽, 이승훈, 정약전, 약종, 약용, 등의 연구와 활약은 모두가 천주교 서적에서 그 출발의 움을 틔우고 있으며, 활동의 영역을 찬반 어떤 방향이든지 간에 넓히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실학이 천주교를 낸 것이 아니라, 천주교가 조선실학을 태동시킨 것이며, 당시 실학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천학, 곧 천주교 진리 탐구와 실천에까지 노력한 선비가 바로 광암 이벽이다.
그리하여 1770년대에 들어와 천학 연구와 실천, 및 전파에 중심적인 지도자 역할을 한 선비가 바로 광암 이벽성조인데, 당시 조선사회를 직시한다면 조선천주교회 창립은, 마치 번역이 저술보다 더 힘들다는 말처럼, 새로운 신흥 종교를 시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면들이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충분한 서적이나 지식이나 성물이나 전문인사, 즉 선교사들과 접촉하기도 힘들었고, 또, 접촉하기 위하여 출국하는 것도 정말 힘든 때였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예컨대, 훗날 한 때 평신도들이 마음대로 미사도 드리고 고백성사도 주었었지만, 곧 중단한 적도 있었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천학에 대한 배타적인 몰이해와 박해로 학습과 그 실천이 더더욱 어려웠던 조건하에서 생소한 조선천주교회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11. "조선천주교회 창립자는 광암 이벽." - 성 Daveluy 주교
성다블뤼 주교(1818∼1866)는 1845년 김대건 신부(1821∼1846)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21년간 선교하면서 조선천주교 순교사의 원본 자료집인 비망기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집필한 프랑스인 선교사로서 조선교구5대교구장이었으며 1866년에 순교하였고, 성인의 시호를 받았다.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 천주교회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그는, 조선천주교회의 진정한 역사가 '이벽(1754∼1785)의 위대한 강학회'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자신의 저서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의 력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시작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간택하여 쓰신 도구는 이벽이라는 사람인데, 이름을 덕조라고 부르고, 호는 광암이었으며, 경주이씨 가문이었다."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초로 삼고자 대학자 암브로시오 권철신을 선택하였다.
특히 1783년에 이벽성조께서 이승훈선생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면서 훈계하는 대목에 관한 다블뤼 주교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되었음은 천주께서 우리나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표지일세. 북경에 도착하거든 바로 천주당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우리민족의 생사가 걸린 일일세. 즉 래세에 관한 막중지사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이승훈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대도사, 스승의 말씀(la parole du Ma tre)처럼 받아들였으며,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상호공동의 신념인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이승훈선생이 이벽성조의 말씀을 "대도사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명심하였다(la parole du Ma tre)는 구절인데, 여기서 스승(ma tre)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 m을 대문자 M으로 쓰고 있다. 프랑스어나 이태리어에서 ma tre가 아닌, Ma tre로 쓰게 되면, 보통의 선생님이 아니라 인류의 대스승들이신 공자, 석가모니, 예수, 마호메트, 같은 분들을 가리킨다. 이는 당시 이벽선생의 위치와 신망과 지위, 학덕과 권위 등이 일반 성현 군자의 수준을 넘는 품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 Daveluy 주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의 시작을 1784년 이승훈 선생의 북경 영세에 두지 않고, 이벽성조의 "저 위대한 강학회"에 두고 있는 것이다(1777). 더군다나 "권철신의 강학회"라는 말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권철신은 당시 신망있고 아주 점잖은 학자였지, 외국종교나 신흥사상을 선전하고, 조직을 결성하는 추진력를 가진 혁명가다운 인물은 아니었다.
12. "이벽이 조선 신도회대표로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 성 Maubant신부
성 Maubant신부(1803∼1839)는 1836년에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선교사이며, 김대건(1821∼1846), 최양업, 최과출, 15세 조선소년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낼 때 추천서를 쓴 신부인데, 그가 입국한 지 2년 정도가 지난 후에 파리에 보낸 편지와 문헌에는 조선천주교회의 창립역사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1720년 경에 북경에 다녀간 사신 이공(역자 주. 이 명)이 서양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역자 주. 광암 이벽)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이고,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동감하고 심취한 나머지, 천주교를 전심으로 받아들였고,(embrassa la religion chr tien)[…]광이라는 (광암 공)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개종자들(pros 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대표자(autre d l gu )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13. "대성현 이벽이 저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주셨습니다." - 이승훈
이벽성조에 의해 파견되어 1784년 봄에 북경에서 영세하고 온 이승훈 선생은, 1789년에 북경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간을 보냈다.
"제 일생에 성현을 한분 만났사온데,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그 책 내용에 대하여 아주 여러 해 동안 전념하며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켰습니다. 이 어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들,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까지도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에 대한 이 어른의 信德과 열성은 교리지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혼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이 어른을 모시고 함께 천주를 섬기는데 있어 상부상조하였습니다"
14. "천학 연구에 탁월한 이벽박사가 이승훈을 北京에"- 금대건 신학생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기 전 신학생 시절, 1845년에 썼던 조선천주교회 략사 보고서 첫 머리도 광암 이벽성조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조선에는 많은 철인들(philosophantes)이 자발적으로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참 天主가 계시다는 것(naturali lumine […] verum Deum […])을 자발적으로 연구하여 인식하고 섬기었는데, 그들 중에 뛰어나게 가장 유명한(inter eos celebrior) 사람은 이벽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아주 깊히 연구하여 참되신 천주를 공경하고자 노력한 나머지, 당시 북경에는 천주공경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북경에 보내어 천주교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승훈은 이벽 박사(doctor I Pieki)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 말을 하였으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하였습니다."
1785년 이벽성조 사후 60여년 후(1844년)에 해외 마카오에서 23세의 금대건 신학생에 의해서 쓰여진 이 내용은, 그가 충남 솔뫼에서 태어나, 7세 때 경기도 용인 산골로 피난와서 10여년을 살다가 15세의 소년으로 1836년 말 마카오로 떠났다는 것과, 더군다나 그 당시에 역사책도 없고, 박해 중이라서 교회 조직도 제대로 없었으며, 산골로 숨어 다니느라고 만나볼 수 있는 천주교신자들의 수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역사지식은 김대건 소년의 스승이었던 정하상 바오로(1795 ∼1839)와 정하상 바오로보다 한 살 아래인 김제준 이냐시오, 즉 김대건 소년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벽성조 사후 60여년간은 조선의 어린 소년들까지도 "조선천주교회는 탁월한 선비 이벽이 세웠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5. "조선 천주학의 시조는 이벽이니," - 조선왕조실록
조선천주교회를 광암 이벽성조가 시작하였다는 것은, 천주교회측의 자료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정약종을 문초한 결과, "원래 처음으로 서양학(천주교)을 듣고 알게 된 것은 이벽이었고, 이벽은 이승훈을 몰래 변장시켜 꾸며서 아버지 이동욱 공을 따라가도록 북경에 보내었읍니다"
더욱이 천주교를 박해했던 사람들이 당시 이벽성조의 두 형제에 대해 올렸던 다음의 상소문들은, 당시 광암이벽성조에 의해 조선천주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모든 이가 공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벽은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이니, 우선 그 형 이격이 아직 벼슬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니, 그 형제들은 즉시 벌을 주어 내 쫓아야 한다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로 말한다면 그것은 이벽이다."
16. "이벽은 조선천주교의 시조다" - 이만채의 벽위편
"요사스러운 전 수사 이석의 형 이벽은 저 사악한 천주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우두머리로서 천주교인들의 시조(일세)라는 것을 만인이 다 알고 있는 바(공지)가 아닌가?"
17. "북경 천주당에 가서 기도서를 구하고 영세를 청하게."- 황사영 백서
또한 이벽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오게 하였음을, 앞에서 인용하였던 다블뤼주교의 서한, 정약종의 증언,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편지 등에서 이미 보았는데, 황사영(1775∼1801) 진사는 이를 자신의 백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고 깨끗이 살던 선비 이벽이 기특히 여기며 크게 믿음직하게 여기던(대기지) 선비였다. 계묘년(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때, 이벽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왈),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 있고, 천주당에는 전교자인 서양선비가 있을 터이니, 가서 신경기도서를 구하고, 아울러 영세하기를 청하도록 하게(병청영세). 그러면 서양선비가 자네를 무척 사랑할 걸세. 그리고 여러 성물을 많이 얻어가지고 와야지, 결코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도록 하게. 이승훈은 이벽의 이 말대로(승훈 여기언) 북경 천주당에 도착하여 세례받기를 청하였다.[…]"
18. "이승훈, 약용 3형제, 권일신 부자, 등이 이벽을 모시고 앉아서" - 벽위편
1784년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영세귀국한 지 1년 후에 일어난 1785년 을사박해에 관한 벽위편의 기록에도 광암 이벽성조와 당대의 다른 학자들과의 관계를 쉽게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을사년(1785년) 봄에 장례원 앞에 있는 금범우의 집에 이벽이라는 사람이 설교를 했었는데, 푸른 수건으로 머리와 어깨를 가리고 벽을 기대어 좌정하고 앉아 있었으며, 그 앞에는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책을 손에 들고 이벽을 모시고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서 이벽의 설법을 듣고 있었으며, 모두가 스스로 다 자기들은 이벽의 제자들이라고 부르더라. 이벽이 저들을 가르치고 꾸짖고 하는 기품이 얼마나 엄격한지, 우리 유교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례의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