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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신혼 시절을 처음 찾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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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6-06-02 ㅣ No.100225

            어머니의 신혼 시절을 처음 찾아보다
                    옥정호의 풍경 속에는 아버님의 청춘 시절도 있고




<1>

우리 가족은 전북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5월 28일의 아침을 맞았다. 눈을 뜨는 즉시 여관방의 창문을 열어보니 아직도 비는 약하게 내리고 있었지만 곧 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상 예보가 정확히 들어맞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족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각은 일정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깨우지 않으면 무한정 잠만 잘 눈치였다. 어른들은 여관과 함께 있는 대중 목욕탕에서 무료로 목욕을 하며 임실 물이 좋은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전날 덕산온천에서 목욕을 했지만 임실 관촌 물을 다시금 온몸으로 접해보고 싶으신지 기꺼이 목욕탕을 찾으셨다.

안산의 누이동생이 준비해온 샌드위치와 빵으로 여관방에서 가볍게 아침 요기를 하고, 아이들을 깨워 9시쯤 여관을 나섰다.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우리는 차에 오른 다음 먼저 관촌면 소재지인 관촌리, 즉 읍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나는 어머니께서 소년 시절에 살으셨던 곳을 기억하실지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그 동네 모습이 이미 예전에 지워진 듯했고, 그 동네의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다음에는 사선대(四仙臺) 관광지를 찾아보았다. 사선대 역시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있지 않았다. 사선대가 1985년에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고 조성되었으니 어머니가 사셨던 70년 전에는 그냥 그 이름과 자연 사물로만 겨우 존재했을 터였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사선대의 모습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흐린 날씨와 안개 때문에 사선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 임실 성당 앞에서 가족 모두 함께
ⓒ 지요하

그리고 우리는 임실읍으로 향했다. 임실읍 이도리에 있는 임실 성당에 가서 주일 교중미사를 지내기로 했다. 어머니는 소년 시절에 언니와 함께 '관촌 공소'을 다니셨다고 했다. 정미소 집의 방을 얻어 천주교 공소를 차린 두 분의 '전도부인'에게서 교리를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나부터 관촌 공소에서(옛날의 그 정미소 집은 아닐지라도) 미사를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관촌에 공소가 있고, 공소에서도 주일 미사가 있다는 말을 아침에 여관 주인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확인하니 관촌 공소의 주일 미사는 아침 8시 30분에 지낸다고 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임실 성당은 5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했다. 외국인 신부님이 지으셨을 것 같은 모양새가 고풍스런 느낌을 주었다. 때가 때인지라 어깨에 띠를 두른 이들이 우리 가족에게도 다투어 인사를 하며 명함을 주었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가 왠지 미안해서, 졸지에 임실 주민이 된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성모상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 우리 가족에게 관심을 표해 주신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신부님은 미사 중 '공지 사항' 발표 시간에 우리 가족을 소개하시며 박수 선물을 안겨 주셨다. "멀리 충청도 태안에서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오신 가족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더욱 고마운 마음이었다.


▲ 임실 성당의 맨 앞자리와 두 번째 자리에 앉아 미사를 지내고
ⓒ 지요하

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한국문협 임실지부장 김여화 선생이 와 있었다. 우리 가족은 김 선생의 안내로 성당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부터 했다. 전날 저녁에 김 선생이 선물해주신, 머루로 손수 빚었다는 맛 좋은 와인을 어머니와 누님도 즐기며 식사를 했다.

임실 읍내의 한 가게에서 유명한 '임실 피자'를 한 상자 사고, 변두리에 있는 치즈 공장으로 가서 일찍부터 명성을 알고 있는 '임실 치즈'도 구입한 다음 우리 가족은 김여화 선생의 승용차를 뒤따라 강진면으로 달렸다.

<2>

이윽고 우리가 도달한 곳은 '섬진강댐'이었다. 우리 가족이 김여화 선생에게 부탁하여 특별히 섬진강댐을 찾은 것은 정말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섬진강댐은 섬진강 상류인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에 놓인 댐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상류 쪽으로 2km쯤 더 올라간 강진면 옥정리에 1929년에 조성된 '운암댐'이 있었다고 한다. 40m 높이의 취수댐이었다고 한다.


▲ 섬진강댐 앞에서 한국문협 임실지부장 김여화 선생으로부터 재미있는 설명을 듣고
ⓒ 지요하


그 운암댐으로부터 하류 쪽으로 2km 내려온 현 지점에 새로운 댐이 처음 건설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이 섬진강댐의 건설로 기존의 운암댐은 완전히 수몰되었다고 한다. 노령산맥 줄기 사이인 임실군 운암면 일대를 흘러가는 섬진강 상류 물을 막은 섬진강댐은 6km 떨어진 반대쪽인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로 물을 넘겨 1945년 4월 불완전하게나마 '칠보발전소'란 이름으로 발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발전은 완전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1948년부터 다시 공사를 추진하던 중 6·25 전쟁으로 발전소 설비의 80% 이상이 전화를 입어 가장 피해가 심한 발전소가 되었다. 1951년 제1호기를 완전 복구했고, 1961년부터 칠보수력발전소를 '섬진강수력발전소'로 개칭했다.

섬진강수력발전소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오늘의 섬진강댐은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전국의 부랑인들을 모아 구성한 '국토건설단'을 투입, 65년에 공사를 마친 중력식 콘크리트 댐이다(이미 <운암강>이라는 장편소설을 가지고 있는 김여화 작가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1940년에 섬진강댐의 최초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운암댐을 대신하는 섬진강댐 건설 공사가 1940년 처음 시작된 덕분에 내 아버님이 청년 시절 이곳에 몸을 놓을 수 있었고, 또 그 덕분에 내 어머니와 만나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신혼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섬진강댐에서는 아찔한 기분도 느꼈다.
ⓒ 지요하

내 아버님께는 두 분의 형님이 계셨다. 장형님은 결혼까지 한 청년 시절에 양친을 잃고 많은 농토를 도맡게 되었으나 어찌어찌하다 모든 가산을 잃고 매우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내 증조부님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많은 돈을 바치고 '통정대부'라는 작호를 받았을 정도로, 우리 집은 원래 향리에서 꽤 큰 부농이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내 아버님은 소년 시절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님의 중형님은 꽤 활동성이 있으셨던 분 같다. 이 분이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객지를 떠돌다가 전라북도 임실 땅의 섬진강댐 건설공사장에 안착을 하고 고향의 형님과 동생을 불렀다고 한다.

거기에서 필체가 썩 좋으셨던 내 백부님은 사무실 안에 편히 앉아 사무 보는 일을 하고, 중백부님은 댐 공사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 오는 일을 하고, 어버님은 공사장 인부들에게 품삯(주로 쌀)을 배급해 주는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때 공사장의 사무를 보는 사람들 중에 전주시 완산동에 집을 둔 사람이 있었다. 그 분이 충청도 서산에서 온 삼형제를 좋게 보았고 특히 막내인 총각 청년을 눈여겨보았다. 자기 처제를 생각하고 중신을 해볼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분의 중매 덕분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1944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섬진강댐 건설공사장 부근인 '왼땡이'라는 마을에서 작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신혼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몸속에 내 누님을 갖게 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섬진강댐 건설 공사가 중단되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주시 풍남동, 어머니의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분의 내 백부님들은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고….

 


▲ 60여 년 전 신혼 시절의 풍경을 기억해 보며 섬진강댐 위를 걸으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섬진강댐 부근에서 살던 시절에 누님을 가지셨다고 했다.
ⓒ 지요하

그러니까 섬진강댐에는 내 아버님의 청년 시절 땀방울이 어려 있는 셈이었다. 또 두 분 백부님의 숨결도 담겨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댐 부근 어딘가에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혼 시절, 60여 년 전의 그 감미로운 설레임이 수놓여지고 몇 섬이나 될지 알 수 없는 깨소금들이 흩뿌려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64m나 되는 섬진강댐 위에서 사면 팔방 어디를 살펴보아도 '왼땡이'라는 마을은 없는 것 같았다.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싶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감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신혼 시절로부터 60여 년이 흘렀으니, 섬진강댐의 규모가 커지고 변모하면서 왼땡이라는 마을은 이름도 실체도 자연 유실이 되었을 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혼 시절이 수놓여진 왼땡이라는 마을은 흔적조차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섬진강댐을 60여 년만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어머니께 남다른 감회를 안겨주는 듯싶었다. 어머니는 몸소 가파른 계단을 타고 댐으로 내려갔고, 344m에 이르는 긴 댐을 두 발로 걸으며 맘껏 감회를 즐기시는 눈치였다.


2006-06-02 15:02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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