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뿌리 마을을 처음 찾아보다
옥정호에서 활꼬지마을까지 아름다운 여행
섬진강댐 옆에서 우리 가족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맛 좋은 '임실 피자'를 잠시 즐긴 다음 다시 이동했다. 운암대교를 구경한 다음 곧바로 '옥정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는 '국사봉'으로 향했다.
'운암호'로도 불리고 '갈담저수지'로도 불린다는 옥정호는 전국의 수많은 호수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정평이 나 있다고 했다. 전체적으로도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특히 국사봉에서 보는 경관이 아름다워 국사봉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국사봉에서 찍은 듯한 사진들을, 옥정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나는 오래 전부터 웹상에서 익히 보아 올 수가 있었다.

▲ 옥정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국사봉'으로 오르는 계단 길. 이 계단 길을 어머니는 너끈히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누님에게 가려졌지만...
ⓒ 지요하
섬진강댐의 건설로 옥정호라는 거대한 호수가 생겨나면서 기존의 운암댐은 물론이고 정읍시와 임실군의 5개 면 22개 리(92.95㎢)가 수몰되었다고 한다. 옥정호의 총 저수용량은 4억 600만 톤이고, 만수위 때의 수면 면적은 26.51㎢이며, 유역 면적은 763㎢라고 한다. '산업기지개발공사'에서 관리하며, 영농기인 4월 11일부터 9월 11일까지 동진강 유역인 김제, 정읍, 부안, 계화도 및 임실군 하류 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한다.
그리고 옥정호의 물을 6km의 수로를 통해 이용하는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 섬진강 수력발전소는 151.7m의 고낙차를 이용하여 1990년 이후에는 1억 7,400만kWh의 전력을 생산한다고 한다.
옥정호의 허리쯤에 위치하는 국사봉은 콘크리트 계단과 나무 계단이 꽤 높았다. 100m는 되어 보였다. 그 계단을 어머니는 문제없이 올랐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누님은 "누가 어머니를 보고 여든이 훨씬 넘은 노인네로 본대요"라면서 좋아했다.
국사봉에서 바라보는 옥정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사진으로만 보던 경관을 직접 눈으로 보는 감회는 실로 컸다. 하늘이 쾌청하지를 못해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 아쉽고 섭섭했지만 우리 가족은 옥정호의 경관에 감탄하며 맘껏 사진을 찍었다. 사진작가들의 촬영 작업을 방해하는 듯싶어 미안한 마음도 가지면서….
국사봉을 내려와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본 것은 임실군 신평면에 있는 '용암리 석등'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용암리 석등은 우리나라의 모든 석등들 중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라고 했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현 문화재청장)가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마지막으로 신덕면 오곡리의 '활꼬지(弓高地)' 마을을 찾았다. 옛날에는 높고 긴 고개 때문에 들고 나기가 매우 어려운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 고개를 낮추고 확·포장을 해서, 그 길 덕분에 이제는 오지가 아니게 되었다고 했다.
활꼬지 마을은 어머니의 친정이 있던 곳이었다. 활꼬지 마을 대부분의 땅이 내 외할아버지의 재산이었을 정도로 외조부는 부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조부 자신이 땀으로 일군 재산이 아니었다. 부모로부터 거저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 우리 부부도 국사봉에서 옥정호를 본 증거를 만들었다. 아내는 풍만한 몸매 때문에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 지요하
여러 명의 머슴을 두고 불로소득을 누리며 편안히 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외조부는 전주로 한양으로 기방 출입을 일삼았다고 한다. 또 기방을 출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생과 하룻밤을 자면서 기생 치마폭에 논문서와 집문서를 넝큼넝큼 안겨주곤 했다.
거기다가 친구에게 크게 사기도 당하여 삽시간에 가산을 모두 잃고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만주의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준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많은 재산을 다 날렸으니, 내 외조부는 그리 똑똑한 분은 아니셨던 것 같다.
가산을 모두 잃고 알거지 신세가 되어 전주시 풍남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똥구멍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가족들을 고생시킬 때는 후회와 한탄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어쩌다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전에는 말을 타고 넘던 재를 두 발로 걸어서 활꼬지 마을을 갈 때는 손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저 논도 내 논이었는데…. 저 산도 내 것이었는데…"하고, "에그, 이 애비가 못난 탓에 너희들을 고생시키는구나. 불쌍한 내 새끼들……."하며 눈물을 지으시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시금 그 얘기를 하며 한숨을 쉬셨다. 이제는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 마을 모습을 둘러보시기는 했지만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쩌면 작은 아버지의 후손들이 지금도 활꼬지 마을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오래 소식이 끊긴 상태여서 찾아보는 일도 쉽지 않을뿐더러 면구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활꼬지 마을을 떠나 전주 방향으로 재를 넘었다. 그리고 삼거리에서 김여화 선생과 헤어졌다. 김여화 선생에게 고마운 마음 한량없다. 우리 가족을 환대해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많은 시간과 노고를 무릅쓰고 몸소 안내를 해주셨다. 임실의 향토사 관련 저술도 많이 하신 분답게 임실군의 구석구석을 두루 훤히 알고 있었다. 정말 김여화 선생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들을 모두 쉽게 갈 수 있었고 이런저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김여화 선생과 헤어져 전주 쪽으로 방향을 잡은 우리는 다시금 전동 성당을 보게 되었다. 지난해 어머니의 고향을 찾으면서 일차 와 본 곳이지만, 지난해의 가족 나들이에 함께 하지 못한 누님과 누이동생을 위해서였다. 누님으로서는 무려 54년만에 세례를 받은 성당, '신앙의 고향'을 찾은 셈이었다.
우리는 오후 5시쯤 전주를 출발, 논산에서 내 아들 녀석을 내려주고 천안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지난해 두 번이나 동생 부부도 함께 왔던 음식점이라 마음 아픈 얘기도 하면서….

▲ 내 외조부의 뼈아픈 사연이 어려 있는 임실군 신덕면 오곡리 '활꼬지' 마을 풍경
ⓒ 지요하
그리고 천안역 앞에서 누님과 누이동생 모녀와 내 딸아이를 내려주었다. 원래는 내 차로 안양이나 안산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일요일 오후의 고속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누님과 누이동생의 만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천안역 앞에서 헤어지면서 누님과 누이동생은 내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누님은 "동생과 올케 덕분에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보는 참으로 뜻있는 여행을 했다"며,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더 고마웠다. 사실은 어머니 덕분이라고 했다. 전주 출신으로 충청도 촌구석 남자와 결혼하고 고향을 떠나 줄곧 충청도 태안 구석에서 살아오신 어머니 덕분이었다. 남편의(또 아들의) 무능과 가난과 만고풍상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오신 어머니, 여든이 훨씬 넘으신 연세에도, 몇 년 전에 대장암 수술까지 받으신 병력(病歷) 속에서도, 최근에 며느리 하나를 앞세운 슬픔 속에서도, 엄마 잃은 어린 남매를 맡아서 보살피시는 어려움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주시는 어머니 덕분이 아닐 수 없었다.
누님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큰 행사를 잘 마쳤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늦은 밤까지의 긴 운전에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차 안에서 우리 가족은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했다.
물론 감사 기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북 실향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지난해와 올해, 두 번에 걸쳐 어머니의 고향과 과거의 시간들을 찾아보는 가족 행사를 가졌다. 비록 50년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실행한 일이지만, 어머니의 고향을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하지만 이북 실향민들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고향을 품속에만 한처럼 끌어안은 채 애달프게 살고 있다.
우리는 진심으로 이북 실향민들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 겨레가 하루빨리 평화 통일을 이룩하여 이제는 황혼 시절을 살고 있는 이북 실향민들이 황혼 속에서나마 고향을 찾아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외식을 할 때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찾은 음식점과 그 음식점의 종업원들을 위한 '청원'도 잊지 않는다.)

▲ 지난해 여름의 '가족 행사'에 함께 하지 못했던 누님은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전주 전동 성당을 54년 만에 처음 와보게 되었다.
ⓒ 지요하
2006-06-0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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