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 방문기
5박 6일간 몽고를 다녀왔다. 전국 223개 지방문화원에서 선발된 사무국장들과 문화원 원장, 그리고 직원 등 일행 28명이 함께 한 여행이었다.
뭘 볼게 있다고 몽고에 가나 싶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하니 비록 고생을 하기는 했어도 참으로 경험하기 힘든 색다른 체험을 했구나 하는 뿌듯함이 더 컸다.
1982년 인도네시아에 근무할 때였다. 산림개발회사인 우리 회사에서 원시림을 벌채한 후 그 자리에 초지를 조성해서 비육우 농장을 할 계획으로 당시 업무과장이었던 내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발리 섬에 소를 사기 위해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주로 ‘끄루바우’라고 하는 물소 종류의 소이거나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젖소가 대부분이었지만 발리 섬에는 ‘발리 소’라고 하는 누런 황우(黃牛)가 있어 비록 몸체는 한우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만 고기 맛이며 육질은 다른 소의 고기보다 훨씬 좋은 편이어서 발리 섬에 무려 2주일을 지내면서 소 60마리를 사서 배에 싣고 보르네오 섬으로 가져온 적이 있었다.
별도로 목장을 하는 이가 없고 발리 섬에서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이들이 몇 마리씩 집에서 키우는 소를 사기 위해 이곳저곳 농촌을 다니면서 킨타마니 화산이 있는 발리의 고원지대를 다니던 어느 날, 초원에서 어린아이들이 소와 양을 방목해 놓고 저희들끼리 모여서 나무 막대기로 놀이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다가 말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아이들이 하고 있는 놀이가 바로 내가 어릴 때 시골에서 동무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즐겼던 ‘자치기놀이’와 하나도 다른 게 없었고 그 아이들의 생김새 또한 마치 내 어릴 때 모습을 빼다 박은 듯이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곳 촌장을 만나서 확인한 결과 그 아이들은 발리 고원지대에 사는 몽고인들의 후예라는 것이었다.
칭기스칸이 중앙아시아를 휩쓸고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했을 때 멀리 자바 섬까지 몽고의 속국을 만들어 조공을 받으면서 당시 자바 섬에 상주했던 몽고인 관리들이 14세기 이후 마호멧 교도들에게 쫓겨서 차츰 깊은 오지나 고지대로 옮겨 숨어 지내며, 3백년 이상 그곳에서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몽고인 부족이라 했다.
또한 흔히들 발리 소라 부르는 황우도 그때 몽고인들이 가져온 대륙의 소가 세월이 흐르면서 토착화 된 것이라 했다.
몽고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륙을 지배한 타타르족, 위글족, 터키족, 가까이는 한족이나 러시아 족과 혼혈이 있어서 그렇지 순수한 몽고족의 모습은 우리 한국인과 구분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같은 체형에 같은 얼굴이다.
인천공항에서 3시간 반 만에 도착한 울란바토르에서 처음 본 입국심사대에 앉은 직원 모습이 그랬고 또한 KAL 비행기 객실의 몽고인 여승무원 또한 모양새가 한국인이었다.
더구나 그 스튜어디스 아가씨는 제복에 명찰이 달려있었는데 ‘우 리아’라고 쓰였기에 나는 그녀의 성이 단양 禹씨, 이름은 요새 흔히들 쓰는 이름인 리아(利娥)인 걸로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중국이나 러시아 영공을 거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 나라,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다. 마치 우리나라 충청북도 같다고나 할까? 칭키스칸이 대륙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를 지나 멀리 페르시아 만까지 정벌했던 그 시절의 영화는 어디로 가고 부침의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결국은 드넓은 대륙이 쪼개져 내몽고 자치주는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되고 외몽골만 가지고 독립을 선포한 나라가 바로 몽골공화국이다.
6월 초, 몽골에는 아침 5시에 해가 떠서 밤 9시 40분에 해가 졌다. 밤 11시를 넘어서야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겨울이 오면 아침 10시에 해가 뜨고 오후 5시만 되면 깜깜해 진다고 했다.
밤 10시가 훌쩍 지났는데도 한참 동안 주위가 훤하니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북위 47도라고 하는데도 마치 백야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말이다.
남한 땅의 17배의 면적에 인구는 겨우 260만,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몽고인을 합쳐봐야 고작 700만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수도 울란바토르에 200만이 살고 우리 일행이 유목생활 체험을 하기 위해 ‘영원한 말의 고향’이란 뜻의 뭉근머리트 고원을 가는 길에 들린 바가놀 시의 인구가 겨우 4만인데, 그곳이 몽골에서 4번째로 큰 도시라고 하는 걸 보면 나머지 국민들은 대부분 넓은 초원에 가족 또는 친척 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잔디처럼 낮은 키의 풀이 덮인 평평한 벌판과 밋밋한 구릉으로 된 초원일 뿐이었다. 바위산이 띄엄띄엄 보였지만 나무 한 포기 없는 바위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바위산 밑에 유목민들이 게르를 짓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바위산이 광야를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온통 민둥산이고 잔디 풀 뿐인데도 ‘게르’라고 칭하는 빠오의 난방은 전부 나무를 때고 집도 대부분 나무집만 짓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만 전국토의 10분의 1이 삼림지대라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이해가 됐다.
주로 러시아 국경과 맞닿는 부분이 산림지대이고 나무 수종은 소나무, 시베리아낙엽송,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숲이라고 했다.
또한 국토의 10분의 1이 곡창지대인데 밀과 귀리 감자 등을 재배하여 인구가 적다보니 겨우 자급자족이 된다고 한다. 년간 강우량이 고작 400미리 내외라 하니 쌀농사는 전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한국에서 온 손님을 맞아 특별히 쌀밥을 지어주었지만 쌀은 안남미 쌀에 밥도 해 보지 않은 솜씨라서 뜸이 들지 않았다. 끓는 물에 쌀을 익혀서 건진 것이었으니 우리들 입맛에 맞을 리가 없었다.
강수량이 워낙 적다보니 몽고인들은 비가 오면 “반가운 손님이 오는 날”이라 할 정도로 전 국민이 모두 비를 반기고 비를 맞는 것을 즐겁게 여긴다고 한다.
실제로 5박6일의 여정이 끝나는 날 울란바토르에서 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걸 보았는데 그 많은 행인들이 비를 피하여 서 있거나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것을 목격한 바가 없다.
우리나라 비처럼 폭우로 쏟아지는 비가 아니고 마치 흩뿌리는 것 같은 비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가 맞아보니 늦가을 비처럼 차게 느껴져서 도저히 비속에 얼굴을 내놓고 서 있을 수가 없는데도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눠가며 한가롭게 그 비를 맞으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전국토가 해발 1500미터 내외의 평평하거나 낮은 언덕들이어서 시야에 펼쳐지는 것이 오직 무변광대한 초원지대였다.
어디를 가나 지평선이 보였고 말과 소, 그리고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그 초원의 물가 또는 산 밑에 드문드문 하얀 천막으로 둥글게 처진 ‘게르’ 라고 불리는 집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 일가족이, 남자는 오른 편 여자는 왼편에 기거했다. 게르 한가운데쯤에 난로나 화덕이 있어 난방이며 취사를 하는데 주식으로 밀가루 빵이나 고기를 먹으며 소나 말 양의 젖을 발효시킨 마유주라는 막걸리 같은 차와 우유 또는 양젖을 곁들여 마시는 것이 그들의 식사메뉴였다.
6월 초인데도 주위가 온통 초봄에 느끼는 풍경들이었다. 위도가 높고 고원지대이대 보니 그런 것일 게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