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노이아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 때에는 파라노이아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좋아서, 그냥 멋도 모르고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파라노이아라는 말은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겉보기는 멀쩡하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사람 중에 파라노이아가 많으니 말이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읽게 된 글이다. ‘파라노이아’라는 약간은 멋스러워 보이는 이국어가 풍기는 ‘뉘앙스’ 때문일까, 인터넷상에는 ‘파라노이아’가 유행이라도 만난 것처럼, 그것도 원래의 뜻과는 아주 다른 모양으로 숱하게 쓰이고 있다. 겉멋에 겨워 멋모르고 쓰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겉보기는 멀쩡하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노파심이 제발 노파심이기를 바랄 뿐이다. 19세기 중엽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엽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했었던 ‘파라노이아’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말이다. 파라노이아의 증상은 이렇단다. 직장에서는, 일도 잘하고 처신에도 별다른 무리가 없는데, 어떤 특정한 사항에 대해서만은 이상하리만큼 집착을 나타내는 현상. 현실을 왜곡해서 바라보고,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만은 망상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의처증 의부증은 그 대표적인 보기가 된다나. 중년 이후에 서서히 증세를 나타내는데, 남성에게 많이 볼 수 있다고 하니 더더욱 걱정이 아닌가. 파라노이아(paranoia)는 정신적 혼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망상증(妄想症) 혹은 편집병(偏執病)으로 번역되어 왔다. 소위 ‘크레펠린 감별법’으로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는 정신병학자 에밀 크레펠린(1855-1926)은 파라노이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일정한 소인(素因)으로부터 서서히 발전한다. 2) 의지와 사고, 행동에서는 끝까지 명석함을 침해받지 않고, 치매로도 발전하지 않는다. 3)지속적이며 체계화 되어서, 흔들리지 않는 망상체계를 형성해간다. 4) 인간의 희망이나 공포와 같은 자연스런 심정이 병적으로 뒤틀린 모양으로 나타난다. 크레펠린의 설에 의하면 파라노이아란 인격의 붕괴를 가져오는 정신병은 아니지만, 어떤 종류의 내적 감성의 돌출(突出) 혹은 실조(失調)의 원인이 되어서 서서히 움직일 수 없는 체계로 구축되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물(異物)로 감지되어 배제되지 않고, 나름대로의 통합을 거치면서 인격의 중심에 끼어들게 된다는 것. 그래서 파라노이아는 한 동안 ‘이성적 광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이성과 광기의 키메라적 동거를 허용하는 특이한 질병개념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는 파라노이아가 극성을 부린 세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위세가 아직도 꺾이지 않고 있는 지대가 한반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일본의 신경내과 의사 고나가야(小長谷)는 <신경내과에서 본 20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의 정치지도자들의 질병을 진단하고, 그 질병들이 그들의 지도력과 판단과 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기술했다. 저자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을 파라노이아로 진단했다. 그가 스탈린에 대해서 기술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레닌의 유서를 뭉개 없애고 닥치는 대로 정적을 추방하여 독재체제를 만들어 갔다.... 붉은 군대와 국민을 숙청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국토 자체를 라겔리(수용소)로 바꾸어 버렸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히틀러가 죽인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한다. 그의 행동 자체는 파라노이아라는 정신질환이어서 신경내과보다는 정신의학의 문제인 것 같다. 파라노이아란, 완고한 망상을 지속하는 것으로 그 밖의 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반듯한 상태를 유지한다. 중년 이상의 남성이 걸리기 쉽다. 회사의 사장, 대학 교수 등이 제멋대로 자기가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나팔을 불어대는 일쯤은 실질적인 해가 없다면 애교 정도로 보아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람들의 운명을 장악하고 있는 리더가 과대망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피해망상으로 숙청을 작정하거나 한다면 이 세상에 지옥을 재현하게 되는 것이다. 스탈린만이 아니라, 독재자들 중에는 파라노이아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