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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제 고향 이야기....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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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항 [vinchen10] 쪽지 캡슐

2006-08-03 ㅣ No.102862

그리스도의 향기

장마가 걷힌 요즈음 아침은 유달리 하늘이 파랗습니다. 눅눅하던 어제와는 달리 잠이 덜깬 저를 맞아주는 아침공기는 잘 말린 이불호청처럼 까슬까슬한 촉감도 상큼합니다. 올해 장마는 유달리 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슴 아픈 분도 많구요. 폭우가 쏟아져 피해를 입은 분들 어떡해요.

요사이 탈출기 공부를 하는데 묵상꺼리로 지금 이 세상에는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며 또한 가뭄과 해일로 집을 잃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이는 하느님이 그들을 버렸는가 하는 숙제가 나왔더라고요.  

때가 때인지라 반이 넘는 교우들이 하느님이 우리를 보호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대요. 막 탈출기를 읽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이끌고 나오는 야훼 하느님에 대해 공부하면서도....   

아직 신앙이 여물지 못해 그런가 하겠지만 최근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쓰나미라든가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대형 지진과 아프리카 땅의 오래된 가뭄 등 자연재해를 보면 하느님이 그들을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겠지요만 글쎄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여름휴가 이야기를 꺼내볼까요.

아직 장마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여름휴가는 어디서 어떻게 보낼건지, 계획은 단단히 세워 두셨는지요. 장마가 끝나면 금새 마음먹은 휴가지로 달려갈거라구요. 

그럼 저마다 여름 휴가 이야기 해볼까요.

음~ 먼저 말 꺼낸 제가 시작할께요. 물좋고 인심 넉넉한 제 고향에 내려가는 걸로 풀어가지 뭐요.

 

**********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 집밖을 나서면 가벼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모든 게 자글자글 끓고 마는 여름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색안경을 써야하는데 고향에 와서 시커먼 색안경을 쓸 수는 없지요. 그러나 어디 따가운 뙤약볕만 있답니까.

작은집에 거처를 정한 저는 저만치 엎어지듯 발치에 다가온 문필봉,앞산까지 소달구지 길을 따라 나섭니다. 언듯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이는 녹색의 벼가 촘촘히 정렬한 나락논이 맨먼저 반기겠지요.

우리 고향은 산골 깊숙이 숨어 있는 조그마한 농촌에 불과해요. 삼십 여호가 무리를 이루어 안골, 음지마, 종가가 자리잡은 양지마에서 상산까지 치켜올라간 김상골, 독실은 타성받이하고 섞여 살고 있지만 요즈음 세상에서는 보기드문 안동 장가 집성촌이랍니다.

근처에는 뜨악하게 양반이라고 폼잡지만 양반골이라고 어디 뜨건운 햇살이 피해간답니까. 다락논과 조막만한 밭들이 굴비두름에 엮인 듯 조막조막만한 콩밭에다 복숭아 과수원과 수박이랑 참외밭이 앞산까지 닿아 있는 산골에 불과해요. 정지용이 노래한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졸대는..." 운운하는 풍요로운 남녘마을과는 여러모로 다르지요. 

다시 우리 마을 앞뜰로 돌아가지요.

게을러 터진 먼달 아제가 처삼촌 벌초하듯 부친 콩밭에는 잡초가 키자랑하자고 우쭐거리네요. 가물가물 여름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콩밭을 따라 걷노라면 이내 작은 아부지네 참외밭이 뙤약볕에 조는듯 엎드려 있는 가장자리로 우뚝 짚을 엮어만든 지붕에 튼실한 나무로 기둥을 박은 원두막이 홀로 솟아 있답니다. 작은 아부지네 참외는 유독 달고 맛나서 온동네 개구장이들의 표적이랍니다. 그래서 밤을 밝히고 제가 참외밭을 지켜야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띄고 왔지만 글쎄요, 제가 바로 참외밭 서리에는 혁혁한 무공이 있는 줄 알란가.

사실 요즈음 시골에는 서리하는 개구쟁이들이 외려 반갑대요. 아이들이 끊어진 농촌에는 시름 또한 커요. 왜냐면 하루종일 고된 농사일 끝내고 들어와도 직업적으로 시골의 농산물을 털어가는 절도범 때문에 졸린 눈을 뜨고 지켜야 하거든요. 아주 차때기로 훔쳐가니 어쩌겠어요. 옛날 참외서리 닭서리하던 우리야 시쳇말로 낭만이라도 있었지만. 이젠 7십을 넘기신 상노인 작은아부지가 그러시더군요. 옛날에 참외든 닭서리든 몰래 서리해가도 개의치 않았다. 가지고 가서 먹은 놈이 바로 우리 마을 아이들인데 어때.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 방학이 시작하고 서울서 너희들 내려올 때면 일부러 원두막을 비워두곤 했지. 실컷 먹으라고.... 이젠 서리해갈 놈도 없네. 마을에 어린아이들 울음이 끊어지니까 세상이 적막강산이야.

 

바로 잇달아 산자락이 성큼 다가온 탓이라 해가 조금만 기울어도 시원한 산그늘에 한껏 달아 독이 오른 참외가 산그늘에 붉게 그슬린 얼굴을 식히겠지요.  사다리를 타고 원두막에 오르면 짓푸른 녹음이 넘쳐나는 산이 바로 코앞에 바싹 얼굴을 맞대고 있습니다. 산을 향해 팔을 내밀어봅니다. 내민 내 손가락마다 푸른 물감이 듬북 묻어날 것만 같은 초록나라에 내가 들어온게 맞나요.

언듯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없으면 이 더위, 어찌 견디겠습니까. 누워서 책이라도 볼라치면 낮잠이 동무하자고 덤벼들겠지요. 

하릴없이 매미가 그악스레 울어쌌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은 나무를 철사줄로 꽁꽁 도여맨 외나무 다리로 위태위태 대여섯 걸음을 해야 넘을 수 있는 폭의 개울이 유유히 흘러갑니다. 장마끝에는 배꼽까지 물이차지만 늘상 어른 무릎은 넘기게 흘러서 동네 풀장이라면 좀 뭐하지만 공동목욕탕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성곡리에서 십여리를 더 걸어서 올라가는 깊은 산골, 김상골 뒤편으로 아주 큰 산이 있어요. 인근에서는 제일 높은 산인데 아주 위엄이 넘쳐흘러요. 우리 문중 산인데 높고도 푸르러서 범접할 수 없는 상산, 산 꼭대기에 믿어지지 않겠지만 제법 넓은 못이 있어요. 아무리 가물 때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비한 못이랍니다. 그 못에서 발원한 냇물이 흘러 산허리를 돌아내려 올 때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시끄럽지요.  개울은 폭이 넓어지고 수량도 넉넉해지면 젊잖게 뒷짐을 진 양반마냥 걸음도 느려지고 말씀도 가려하나봐요. 산계곡을 타고 급하게 달려오던 냇물이 마을을 지나고 푸른 벼이삭이 바람따라 춤추는 논두렁을 끼고 돌아오다가 비로소 내가 누워서 책을 읽는 원두막에 이를때면 어느새 의젓하기 짝이 없어요. 

옛날 이 마을에는 경당할배한테 글을 배운 선비가 계셨대요. 제 위로 십 삼대 조상님인대 똥구녕이 찢어질 듯 가난한 살림에 글은 무슨 글 농사나 짓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글만 읽었답니다. 어느 여름 날, 낭낭하게 글을 읽던 선비의 목소리가 타고 넘던 울바자에 호랭이 장가 간다는 여름비가 세차게 뿌렸대요. 그 바람에 한바탕 그악하게 울어쌌던 매미도 좀 숙지겠지만 뒷마을 콩밭매는 품팔러갔던 아낙이 돌아오기 이른 시간 볕에 말리던 삼베 두루막은 누가 걷나요. 무능한 선비가 살림도 팽게치고 글만 읽던 그날, 비에 젖은 삼베두루막을 걷으며 할매는 서럽게 울었더래요. 콩밭을 매다가 중참으로 나온 개떡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마당에 냅다 팽겨쳤대요. 옛날 이야기 하니까 그렇지 먹을 것이 귀하던 옛날 여름날 개떡이나마 먹을 게 그리 넉넉했는지 아십니까. 

 

모든게 정물화마냥 가라앉은 한낮, 멀리 양지마에서 내려오는 외길에 언듯 종가 뒤에 사는 칠전 아제가 누렁이를 끌고 오는 걸 본 듯 했다. 내가 누워 있는 원두막 곁으로 내려가던 개울이 작은 아부지 참외밭 끄트머리에서 산을 타고 음지마 쪽으로 돌아가버리지요. 그러나 왼편으로 눈길을 주면 우람하게 서있는 느티나무와 그 아래 마을 초입 너른 터가 나온답니다. 어른 팔로 세 아름이 넘는 느티나무가 넓고 짙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너른 터에는 넓이가 한 여남은 마지기 논에 견줄만한 못이 푸르게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음지마 쪽으로 돌아가던 개울이 목이나 축이라고 남겨준 여린 갈래가 졸졸 소리를 내면서 느티나무가 너른 팔을 펼쳐든 그늘 아래 못 안으로 숨어버리지요. 여름이면 온통 연꽃이 빽빽하게 덮어버리는 이 한치 못과 느티나무야말로 우리동네의 고달픈 역사를 한숨과 한을 품고서 지켜보는 마을의 어머니라고 해야 하나요. 

그래요, 이제는 많은 일가붙이가 떠나고 없는 마을을 일월심 변함 없는 마음으로 지키고 있는 충직한 산증인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럼 첫 번째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일제 때 간도로 떠나가는 종갓집 세째 서방님을 떠나 보내던 새댁이 아무래도 첫 번째가 아닐까요. 세비루 망토에 사각모자를 썼던 훤칠한 동경유학생이 독립운동 한다고 친정집 백부님을 따라 길 떠나던 날 눈물로 보내던 임청각 형수님이 오래오래 서있던 곳이 한치못이랬대요. 

그 서방님이 남루한 입성에 야음을 타고 몰래 찾아왔을 때도 느티나무는 지켜보았겠지요. 헤지고 땀냄새가 진동하는 서방님 입성과는 달리 인민을 해방시키고야 말겠다는 푸른 이상만 하늘 높이 솟아올린 빨지산이 되어 돌아온 서방님이 무척 야속했답니다. 남들은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와 떵떵 거리며 출세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도 숨어서 다녀야하는 서방님 신세가 슬펐서요.

앙상하게 들어난 서방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밤을 세워 울었다지요.  번듯한 고성 이씨 임청각에서 시집 온, 종갓집 세째 며느리 설운 사연을 그 우람하던 느티나무위에서 보초를 서 주던 소쩍새가 봄이 올때면 긴밤을 오래오래 울었대요. 

사변 때는 여기서 인민재판에 붙여진 웃마을 아랫마을 사람들이 굴비엮이듯 붉은 완장을 찬 상머슴한테 죽창으로 찔리기도 하고 위대한 인민의 이름으로 죽어가기도 했답니다. 우리마을은 아무도 흉한 꼴을 당한 이가 없었대요.  붉은 별, 종갓집 서방님 덕에 말이지요. 사변이 끝나고 국방군한테 시달린 게 더 극성스러웠지만. 서방님 소식은 아무도 몰라요. 누구는 북쪽으로 올라가 높은 자리까지 하다가 숙청 되었다는 말을 예상스레 한 사람도 있지만 말이란 게 어디 믿을 게 있습디까.

 

식민지 조국의 한 지식인이 나라를 되찾고 착취당한 백성에게 자유롭게 살게하겠다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사랑하는 아내와 정든 고향을 떠나 간도와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지켜보았던 역사의 현장, 비장함이 묻어나는 이 곳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 더 할께요.

민주당 때는 우리 아부지가 도의원 나오셔갔고 이 나무밑에서 연설을 했지요. 마이크 소리 쩌렁쩌렁 울리던 때가 좋긴 좋았어요. 기호는 셋째 해갔고 명함만한 종이에 아부지 함자를 찍은 선거쪽지를 돌리며 어찌 그리 신이 났는지.... 어예 됐냐구요. 제일 기름 진 상논만 열서너마지기 날렸어요. 그리고 우리는 읍내로 들어오고요. 부칠 논밭전지가 있어야 농사라도 짓지요.

 

어느새 천하를 호령하던 태양도 서산에 넘어가는 신세가 되니 별 수 없이 저녁 어스름이 고향 마을에 찾아오네요. 유달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푸름이 넘쳐흐르던 들녁과 잇달아 얕게 깍은 말갈기처럼 생긴 앞산 소나무 숲이 남기, 푸른 기운에 젖어갑니다. 개울가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희고 노란 꽃잎을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아마 개망초라고 하나요. 어릴 때는 계란꽃이라고 입을 다셨는데 이제는 언듯 먹을 것이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배가 부른 모양입니다.   

여름, 시골길에서 생명의 생생함을 봅니다. 까맣게 잊고 사는 자연의 생명 평화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표현이 어울릴까요. 이렇듯 항시 바삐 살던 서울에서의 삶에서 해방되어 까무룩하게 잊어버렸던 고향에 돌아와 접하는 낮익은 산과 물, 개울가에 핀 개망초에서 나는 나다움을 찾아갑니다.

생각해보면 자연의 생명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적대자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쉬임없는 일상의 노예됨이 자연의 생명평화를 짓눌러 뭉개고 억압하며 끝장내버린다고 할까요.

휴가란 이렇게 잊어버린 자신을 돌아보고 거기에서 영원한 안식을, 어떤 자리에서든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아 가는 게라고 생각합니다.

 

더 시원하고 푸른 추억이 깃든 내 고향이야기를 풀어가도 될까요          

 

* 음지마, 양지마란 말은 양지가 드는 남향 마을을, 음지마란 하루종일 햇볕 보기 힘드는 북향 또는 동향 마을을 가리키는 사투리입니다.

* 문필봉이라는 것은 붓처럼 삼각형 산이 마을 앞에 서 있으면 선비가 많이 나온다고 양반골에서는 제일로 치던 집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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