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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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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6-08-26 ㅣ No.103680

연중 21주일     2006년 8월 27일 


요한 6, 60-69.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 6장의 마지막 부분을 들었습니다. 6장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성찬의 의미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합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성찬, 곧 성체성사가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복음서는 2장에서 예수님이 성전 상인들을 쫓아내어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를 한 다음, 그리스도인의 성전은 성찬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렇게 해설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씀하셨다.”(2,21). 그러나 그 사실을 제자들이 깨달은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이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상기하고 성서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2,22).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몸인 성체가 그들의 성전임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또한 이 성찬이 그냥 먹고 마시는 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이별의 만찬을 하셨고, 신앙 공동체가 거행하는 성찬은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만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다른 복음서들은 이미 집필되어 있었고, 신앙 공동체들은 성찬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성찬의 기원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서의 저자는 성찬의 의미를 밝혀서. 그것이 먹고 마시는 허례허식으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주인이요 선생인 내가 발을 씻었다면 그대들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3,14). 성찬은 먹고 마시는 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섬기는 종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태어나는 신앙 공동체들의 한가운데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성찬을 봅니다. 그는 성찬이 신앙인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성찬은 육의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육은 자기 자신만 확대해서 보는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육은 잘 먹고, 편하고, 출세하여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은 삶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그런 삶을 위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영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열리는 넓은 삶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기 주변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하느님 자녀의 삶을 의미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을 받들고 그 생명을 이어서 산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가 부모와 같은 생명을 산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산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현대인은 각자 자기의 창의력을 좇아서 독자적으로 삽니다. 오늘과 같이 개인의 창의성과 독자성이 중요하게 생각된 시대는 인류역사에 일찍이 없었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 생명을 이어서 사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명 현상을 읽어내어 그것을 빛으로 삼아 살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육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영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아끼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을 위한 헌신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영이 주는 생명입니다. 그런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있게 하기 위해 자연은 많은 일을 합니다. 꽃 한 송이를 피게 하기 위해 햇빛과 수분이 공급되고 땅이 보존한 양분이 흘러듭니다. 그래서 대지에는 식물과 꽃이 있고, 여러 가지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부모 된 사람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않기에 자녀가 태어나고 자랍니다.


소설 ‘흥부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놀부는 육의 일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표본입니다. 놀부는 많은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호박씨를 얻어 횡재하기 위해 제비의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흥부는 가난하지만 형의 재물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리 부러진 제비 한 마리의 생명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물론 이 소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려는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흥부가 축복 받게 함으로써, 재물만 욕심내지 않고 미미한 생명이라도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고 돌보는 데에 하늘의 축복이 있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영을 따라 사는 생명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주변에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 혹은 욕심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사람은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3,3)고 말합니다. 영의 삶은 우리 생명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과의 교감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감을 가장 강도 높게 또한 확실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성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빵은 본시 육을 위한 음식이지만, 성변화 후에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 안에 재생시켜서 영의 삶을 살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 보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삶이 발생하게 합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하는 성사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들은 기도와 성서 독서, 그리고 성찬은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신앙인은 성찬에서 힘을 얻어 영의 삶, 곧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는 삶을 삽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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