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일 (화)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 묵상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8-31 ㅣ No.191596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4,18ㄱ)

 

'희년의 은총인 기쁨과 자유와 해방!'

 

오늘 복음(루카4,16-30)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신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당신께 건네진 아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사61,1-2)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루카4,18-19)

 

이 희년(禧年) 선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자 목적이며,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희년의 은총인 '기쁨과 자유와 해방'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며,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누려야 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독서(1코린2,1-5)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1코린2,1-2)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2,3-5)

 

이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희년의 은총인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한 답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이 누리고자 하는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은총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마음이 온전하게 향해 있을 때 주어집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삽시다!

 

(~ 바룩4,29) 

 

조욱현 신부님_: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명 선언과도 같은 장면을 전해 준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으시며, 그분의 사명이 무엇인지 밝히신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18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아’ 즉 ‘기름 부음 받은 이’로 오셨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말씀 선포’와 ‘해방’으로 요약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힌 이들에게 자유를, 눈먼 이들에게 시력을,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분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었다. 믿음이 없으니 기적도, 구원도, 그들의 삶 안에서 열매 맺지 못했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선언”으로 보았다. 성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목적은 단지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속박된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데 있다.”(De Orat. Dom. 18 요약)라고 강조했다. 성 이레네오는 이사야의 예언 성취를 주목하며, “그리스도의 현존은 구원의 현실을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내는 사건”(Adv. Haer. III,20,2 요약)이라고 말했다. 곧 ‘오늘’이라는 말씀 안에 구원의 시급성이 드러난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시력의 회복이 아니라, 불신의 어둠에서 벗어나 믿음의 빛을 보게 하는 것이다.”(Exp. Evang. sec. Luc. IV,44 요약)라고 풀이한다. 교회도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인간 존엄의 회복으로 이해한다. 사목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충만히 실현시키기 위하여 오셨다.”(22, 13, 17항 참조)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사명에 동참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작은 나눔, 억눌린 이들을 향한 위로와 정의로운 목소리, 절망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는 희망의 증언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곧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우리 삶의 자리이다. 또한, 우리 안에도 여전히 믿음의 눈이 가려진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익숙함 속에서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주님의 현존을 쉽게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구원 사명을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이며, 우리 또한 이 세상 안에서 작은 해방자, 작은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은혜로운 해 

 

연중 주간 평일 미사 복음 말씀으로 마르코 복음과 마태오 복음에 이어, 오늘부터 마지막 주간까지는 루카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고 묵상하게 됩니다.

 

루카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교 사명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의 유다교 회당에서, 안식일 전례 중에 선포되고 개시됩니다. 예수님은, 이사 61,1-2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을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 아람어로는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세상과 일류를 위한 구원사업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이 뜻을 완수하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기름으로 축성되고 파견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계신 겁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 잡혀간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해방,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기, 한 마디로 은혜로운 해 선포에 당신의 사명이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물론 말씀으로만 이루어지는 선포가 아니라, 온몸을 투신하여 이루어내실 선포를 말합니다. 당신의 구원 사업 일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완성까지 담고 있는 선포입니다.

 

이러한 사명 선포 앞에서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반문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람인데, 어디서 저와 같은 권위와 능력이 나오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의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그 똑같은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났다.하는 또 다른 반응이 뒤따르는 것을 보니, 그 말씀이 사람들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첫 말씀이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하는 말씀이었으니 말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대변하여 시대와 장소의 문제를 직시하고 소리를 높이니, 청중 대다수는 귀를 막고자 했고, 반대의 기운을 높이려 했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늘 소외되고 반대의 표적이 되는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그것도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지역에서 펼쳐진 일을 상기시키십니다. 엘리야와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1열왕 17), 엘리사와 시리아 군사령관 나아만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2열왕 5). 이 두 이방인은 예언자들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구원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예를 통해서 우리는, 결국 예언자들이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 곧 하느님 말씀의 내용 때문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세례성사를 통해 당신 자녀로 삼으신 가톨릭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백성 됨 또는 자녀 됨이 특권이라면, 오히려 하느님 말씀 청취와 실천에 더욱더 모범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며, 비뚤어진 신앙 자세를 회개로 바로잡는 가운데, 믿는 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가꾸어나가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9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