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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여성의 인권을 마구 짓밟는 북한 독재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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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구 [hmk12] 쪽지 캡슐

2004-04-29 ㅣ No.66555

여성들의 인권을 마구 짓밟는 북한 독재체제  

차정희(전 북한군 여성 중대 중대장)  

2004-04-28 16:16:57   

 

 

 

 

북한군 여성 중대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한 탈북여성이 탈북자동지회(명예회장 황장엽)가 발간하는 회보 [탈북자들] 4월호에 자신이 북한에서 경험한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는 글을 게재했다. 다음은 연속물로 기획된 이 기고문의 첫 번째 편이다.<편집자주>

 

 

- 탈북여성

나는 북한에서 한 평범한 사무원의 가정에서 둘째딸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님은 3대 외독자인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6명의 딸을 낳으셨는데 40이 되어서야 첫 아들을 낳았다. 북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다 같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는 그 누구보다 컸던 것 같다. 하여 상급학교도 뒤로 미루고 인민군대에 탄원하여 군대에 입대하였고 여성 중대 중대장으로까지 성장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당과 수령에게 충실한 군인으로 성실하게 복무하였다. 그런 내가 어떻게 두만강을 건너 이국 땅으로 탈출하여 결국은 여기 대한민국에까지 오게 된 것인가.

 

실로 1997년은 어려운 해였다. 그 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던, 돌이켜 보기도 끔찍한 어려움은 평양에서 살던 우리 가정에까지 닥쳐왔다. 국가에서 배급은 주지 않고, 어디서 방조 받을(도움 받을) 곳도 없었다. 세 자녀의 어머니였던 난 점점 조여오는 식량난으로 하루하루 끼니를 대기조차 힘들었다. 원래 변변치 않은 살림살이다 보니 쌀과 바꿀만한 것도 없었는데 문득 ´시집 올 때 가지고 왔던 사발 두 개가 혹시 유물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들도 그런 것 같다고 하였다. 하여 나는 그 사발 두 개를 큰딸한테 주어 무산에 있는 시누이한테 가서 중국 보따리 장사꾼들에게 팔아 오라고 하였다.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딸은 떠난 지 두 달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시누이한테 소식을 띄웠으나 거기서도 소식이 없었다. 하여 나는 어린 둘째 딸만 데리고 무산으로 큰딸을 찾아 떠났다. 무산에 와서야 나는 큰딸도 그리고 시누이도 벌써 오래전에 행방을 감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둘은 내가 보낸 사발 두 개를 가지고 장사꾼들에게 넘겨주다가 그들의 꼬임에 걸려 중국에 팔려 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하였다. 결국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을 영원히 잃는가´, 아니면 이른바 ´내 당적 양심을 지키는가´ 문제로 고민하였는데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나는 딸을 찾는 길을 택했다. 나는 1997년 10월 11일, 12살 어린 아들을 평양에 남겨둔 채 어린 둘째 딸의 손목만 잡고 눈물을 흘리며 큰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강에 들어섰다. 두만강은 겉보기에는 별치않아 보였다. 강폭도 대동강에 비하여 비할 바 없이 좁고 물살도 그리 세찬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강에 들어서자 세찬 물살은 단번에 나와 어린 딸을 갈라놓았다. 그 세찬 물살에 엎어지고 뒹굴고 하면서도 어린 딸이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보니 정말이지 하늘 땅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긴급한 상황에서 문득 항일 투사 김동규가 쓴 "동지들 이 총을 받아주"가 생각났다. 참으로 지금 생각해 봐도 기가 막힌 일이다. 당장 눈 앞에서 딸이 죽는가 사는가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데 왜 뚱딴지 같이 그런 회상기(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이 빨치산 활동을 회상하면서 쓴 책) 생각이 났던지.....

 

그러고 보면 북에서 내가 받은 사상교육도 웬간히 골수에 깊이 박힌 것 같다. 다행히 하느님이 우리 모녀를 구원하여 준 것 같다. 그대로 물에 둥둥 떠내려가던 딸이 옅은 여울목에 걸리면서 우리는 다시 부둥켜안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까지 아직 이 세상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그저 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딸이 목숨을 건지자 "하늘 땅 할아버지 고맙습니다"하며 두만강 기슭의 큰 바위 밑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였다. 거기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딸을 깨워 데리고 중국 로가의니스라는 마을 아무 집이나 들어갔다. 다행히 그 집 주인들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옷도 갈아입고 식사까지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기도 하지, 우리는 그 때 거기서 큰딸의 생김새에 대해 말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당장에라도 찾을 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넓으나 넓은 중국에서 큰딸을 찾는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우선은 일자리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에도 우리가 든 집주인이 노력해 줘서 우리는 화룡시 어느 한 집 가정보모로 들어가게 되었다.

 

가정보모를 시작으로 식모살이, 모내기, 김매기, 풀베기, 돼지 기르기, 실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큰 딸을 찾는 일이라면 그 무엇도 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정말이지 마른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때 나는 한 가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니는 것이 있었다. "당증"과 "평양시 시민증"이었다. 큰 딸만 찾으면 평양으로 돌아가겠다고 그 아무 데도 쓸모없는 당증이며 평양시 시민증, 작은 딸 출생증 같은 것을 목숨같이 간직하고 다녔으니 ´나도 참 어지간히 한심하였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나는 물론 우리 어린 딸이야 언제 그런 일을 해보았겠는가. 실로 평야에서 태어나서 반생을 넘게 살아온 나지만 그런 일을 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린 딸을 부여안고 눈물 흘렸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큰딸을 찾아야 한다는 오직 그 한 가지 마음으로 참고 견디었다.

 

그러던 1999년 7월 어느 날 밤 우리 모녀는 중국 길림성 용정시 팔도에서 뜻밖에도 중국 강도 놈들에게 잡혔다. 상습 인신매매범들인 그들은 우리 모녀가 소리를 지를까 입을 틀어막고 칼을 배에 대고 차에 마구 실으며 공안 경찰이라 거짓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도 무서워서 소 외양간 한 쪽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쥐들과 함께 살던 우리였는데 그날 따라 몸도 아프고 하여 오래간만에 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가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놈들은 우리를 화룡시 서가자란 곳에 끌고 가 내몽고 웬 중국 사람한테 한사람당 인민폐 만원 씩 받고 팔려고 하였다. 우리는 실로 목숨을 걸고 반항하였다. 하지만 연약한 모녀가 어떻게 그 억대우 같은 놈들을 당할 수 있으랴. 다행히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온 옆집 사람이 공안에 신고하여 끌려가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우리는 공안에 체포되었다. 이런 것을 보고 늑대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는 공안에 잡혀 다음날로 변방대 구류장에 이송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8월 10일에는 북한 무산군 보위부에 압송되었다. 사실대로 말해서 북한으로 다시 송환될 때 겁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자기 나라인데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너무나도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송환되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군 보위부에서 젊은 녀석들 두엇이 나와 늙은이, 젊은이, 아이 가리지 않고 우선 모조리 발가벗기기부터 하였다. 할머니이고 젊은 색시이고 처녀이고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두 팔을 앞으로 쳐든 채 앉았다 일어나기 60번을 시키는 것이었다. 은밀한 곳에 감춘 돈 같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실로 치가 떨리었다. 이 곳이 ´내 나라인데 하고 온 조국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변방대 구류장에 오래 잡혀 있어 심장이 나빠 못 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한테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생각들 해 보라. 아직은 철이 없는 딸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를 육십 번씩이나 해야하는 어머니를. 나도 인간이다. 나도 그 아이를 낳아 기를 적에 ´자라거든 당과 수령을 위해 충실해야 한다´고 수 없이 가르쳤던 어머니다. 그런데 그 수령과 당의 졸개들이 그 아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그렇게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승냥이(늑대) 같은 놈들은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모조리 외줄로 세우더니 서로 항문을 들여다보며 감춘 것을 파내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것이 내가 처녀시절 10년을 고스란히 받쳐 지킨 그 빌어먹게도 위대하다는 당의 "현명한 영도와 은정깊은 사랑"의 결과 인 것이다. 정말이지 이가 갈렸다. 나는 사람이 너무 격분하면 온몸이 그냥 푸들푸들 떨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 ´북한 보위부 사람들도 사람인데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너희들(탈북자들)은 북에서 도망쳐 왔으니까 당연히 그곳 나쁜 이야기만 하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만에, 믿고 싶던 말고 싶던 이것은 내가 직접 겪고 체험한 사실이다. 특히 한총련 학생들에게 내가 직접 겪은 체험을 말하고 싶다. 사실대로 말해서 이보다 더한 행위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나 자신이 북한 사람인 것이 창피하여 이만 그래도 한결 듣기 좋은 말만 쓰고 만다.

 

물론 이런 행위를 시킨 사람들은 ´이쯤해야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는 중국으로 갈 생각을 안 할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순간에 내 머리 속에서 마지막까지 나를 괴롭히던 충성심 꼬투리가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니 충성심이 날아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무서운 복수의 불길이 활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래 너희들 아무 짓이나 해라. 하지만 내 다시는 너희들한테 속지 않는다. 그리고 내 여기서 살아 나가면 반드시 다시 중국으로 갈 것이다. 두고 보자. 언제이건 너희들은 반드시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8월 11일 무산군 강제 노동판에 이송되었는데 그로부터 3일 만에 탈출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12살 된 딸아이마저도 그 강제노동판에 남겨둔 채. 아 그때의 그 아픔은.....

 

결국 나는 큰딸을 찾으러 갔다가 작은 딸마저 잃고 말았다. 어머니 아닌 사람은 아마 백 번 말해도 그 아픔을 모를 것이다.

 

independent@independen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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