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6일 (월)
(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자유게시판

"2000년이지나도록"예수님께서십자가상에서내려오지(펌)

스크랩 인쇄

김갑상 [Grasse] 쪽지 캡슐

2004-05-20 ㅣ No.67129

불쏘시개(www.spill.or.kr)에서 펌

 

예수님께서 2000년이 지나도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시는...(펌)...

이름 : 도화지     번호 : 4586

게시일 : 2004/05/20 (목) AM 00:02:31  (수정 2004/05/20 (목) AM 00:26:31)    조회 : 7  

 

Passion of the christ.

몇 십 년 만에 영화관엘 갔습니다.

필름이 돌기 시작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내 내 앞자리 관람객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더니 뒷자리에서도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옆자리 남자는 몇 번이나 한기를 느끼는 사람처럼 몸을 떨다가 중간쯤에 일어서 나가드니 다시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눈에 독을 품으며 뚫어 져라 스크린을 바라보던 나의 눈에도 드디어 눈물이 솟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죽이라고 함성을 지르는 대사제들과 원로들과 군중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에서 전신에 피가 한꺼번에 다 빠져 나간듯하여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눈물이 핑 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이 넘도록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하는 이유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여기에 시퍼렇게 살아서 엄지를 거꾸로 내려 꽂으며 예수님을 처단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저들의 단말마적인 저주가 지금도 시시각각 들립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언제나 다음의 성서 구절을 이용할줄 아는 자들입니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13,1­2-

하느님의 권위를 참칭하는 그들은 이 말씀으로 백성의 입을 봉합니다.  

神의 畏敬을 이용하여 혹세무민하며 ‘새로운 계약’을 훼방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주렁주렁 내걸고 다닙니다.

“그렇게 해치워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에게 손을 대고 죄를 받지 않겠느냐?.......내가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에게 손을 댔다가는 야훼께 벌을 받으리라”(I사무 26,8~11)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성별해 세우신 상전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그 분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 받을 소리다.”(I사무 24,7)

 

 

그러나 예수님을 처형한 자는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속되어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지금 그곳에서 조용히 계시는데.. 왜? 우리들이 하느님을 오라 가라 하며. 왜 우리들이 마음대로 하느님의 뜻을 빙자 하여 서로 잘났다고 하는지?…….” 운운하며 그들에게 부화뇌동 하는 순진한 신자대중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를 모릅니다.

무지한 백성들은 무대 앞이든 무대 뒤이든 두렵기만 한 하느님의 이름 석자 앞에서 감히 다른 생각은 엄두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가엾은 백성인 무지한 수구론자들이 따라 내지르는 함성은 영영 떠나가지 않는 메아리로 남아 있습니다.

 

 

2000년 교회사는 쉼 없이 쇄신이라는 이름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 쇄신의 역사는 참으로 험난합니다.

언제나 쇄신을 부르짖는 자는 소외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한국 주교회의에서는 교황청의 명을 빌어 이제민 신부 등 세분 신부의 붓을 박탈 해 버렸습니다. 그분들은 강단에서 쫓겨났고 일부는 외유라는 이름의 유배중입니다.

이 세분의 필봉이 얼마만큼 사도적 예언직을 수행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분들의 연구는 적어도 계명을 좇아 환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수구론자들은 치부를 찾아 내 보이는 행위를 역적으로 간주합니다. 시끄럽다고 합니다. 반골기질의 권위를 거스르는 배신자로 묶어버립니다.

쇄신론자들이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쇄신론자의 숫자보다 수구론 자의 숫자가 월등히 많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평신도 대중이 그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득권자들은 항용 그 우세한 수구론 자들을 배수진으로 이용할 줄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못 박은 역사적 가공할 지상 최대 권력행각의 죄는 대사제들 보다 오히려 그들의 배수진이 되어 빌라도 앞에서 고함을 따라 지르는 수구론자들인 우리 평신도에게 있습니다.

누가 바른 소리 좀 할라치면 그 자리를 피하여 귀를 씻으려 합니다. 부정한 소리를 들었으므로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 질 가 두려운 것입니다. 아니면 사방에서 쏘아 붙이고 이죽거리며 왕따를 시킵니다.

“참...... 왜 그리 잘 났는지..?

하느님 믿는데 뭐가 그리 복잡하고 형식이 많은지?

그냥 믿읍시다. 믿음은 각자 다들 틀리련만............

유식하다고 다들 하느님 나라에 갈수 있는지 궁금하군.

진심으로 기도 하고 봉사 하는 분 들을 위해서 제발 가만히 계셔주시오.“

‘하느님께서 세운 교회’라고 우러러 바라보면서 쇄신이라는 말조차 죄요 벌인 것처럼 느끼는 신심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평신도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노예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나서는 자, 아는 자, 말하는 자에 대하여 진과 위를 캐어 가리려는 의지는 상실한 채 무작정 끌어 내리고 있는 자, 권력자에 대하여는 허와 실을 조명하려는 이성적 의지는 배제하고 무조건 경원하고 멸시 하려는 피해의식에 젖은 것도 슬픈 일입니다. 꼬이고 뒤틀리고 눈을 감은 채 치받는 형국은 차마 보기 민망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정과 직장에 대해서도 아픈 데를 묻고 비가 새는 데를 찾아보자는 데도 귀찮다고 시끄럽다고 아는체하지 말라고 건방떨지 말라고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인간집단(교회)에 존재하는 부조화와 모순을 무조건 인정하려들지 않을 수 있는지 참으로 위구스럽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시고 성령에 의하여 지켜지지만 불완전한 인간에 의하여 교회가 엄청난 오류를 범한 암흑의 역사를 우리는 안고 있습니다. 현 교황님께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난 이천년 동안 저지른 과오와 숱한 만행을 만방에 사죄하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교회의 쇄신이 곧 복음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쇄신을 위한 비판을 끔찍이도 거부하는 이유는 성심을 여쭙기 이전에 단순히 자신이 ‘소유한 것’이 폄하 당하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쇄신은 복음화의 원천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따르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정보화시대의 특징은 바로 다원주의입니다.

Fusion 음식을 먹고 postmodernism이라는 이름의 찻집에 들려서 종교다원주의라는 이름의 차를 마시고 wellbeing 이라는 밀회를 즐기고 개그 콘서트를 보러 갑니다.

소위 네티즌들은 이미 일원론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하나의 고전, 하나의 도덕률, 하나의 교리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습니다.

불변의 가치는 붕괴된 지 오래입니다. 수직적 가치관에서 수평적 가치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권위나 격식을 중요시하는 종적유대를 거부하고 실용적인 횡적유대를 따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점점 교회를, 신을, 하느님이나 예수를 찾지 않습니다. 등잔불을 밝히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점점 사라져 갑니다.

순명이라든가 인내라든가 희생이라는 말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오는 이상한 이야기로 여깁니다.

적어도 형이상학적 사고는 사라졌습니다. 고독이라든가 애증의 갈등이라든가 모든 근심걱정도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하거나 연연하지 않습니다.............

니체는 그가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물질에 의해 살해된 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유럽과 로마에서의 기독교 쇠퇴에 이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부흥을 바라고 예견(기대)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이에 맞물려 대두되는 과제가 종교다원화라는 신학입니다. 동양권에는 기존 토착종교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다원주의가 토착종교와의 생존을 위한 단순한 타협의 의도로 생긴 것이 아니라 상호 진리의 속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성숙된 자세로서의 신학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하고 죽은 많은 영혼들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솔직히 답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 -요한14,16- 고 하신 말씀은 이제 용도 폐기 되는가?

심지어 성급한 환상주의자들은 야훼, 알라, 브라만, 도, 한울님 나아가서 샤머니즘까지 이 모두가 절대자의 다양한 인간적 표현의 하나라는 결론을 도출해 놓기도 합니다.

성탄미사에 이웃 불교사찰 스님이나 불자들이 참례해서 구유참배도 함께하고 감사예물도 내고 합장하며 축하하고 돌아갑니다. 우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도 석가탄일에 성당 정문에 석탄축하 현수막을 걸고 사찰을 찾아 대웅전에 들어가 성호를 긋고 목례를 합니다.

어느 성당에는 감실 뒤에 고상 대신 광배까지 똑같은 미륵반가사유상을 머리에 가시관을 얹어서 세워 놓고 마당에 백제탑을 닮은 칠층석탑을 칠성사탑이라고 이름 붙여 세워 놓고 성당 천장에는 유가 도가의 글귀를 써 붙인데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정문에 사천왕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성당의 성모상은 연화대 위에 관세음보살을 그대로 빼 닮았습니다. 토착화된 성상이랍니다. 불상의 형상은 우리 것인가. 간다라 것입니다.

진정한 다원주의는 섞는 것이 아니고 고유성을 간직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뼈에 좋다고 우유를 먹느라고 야단들이지만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는 풀만 먹고 삽니다.

필자의 천박한 지식과 미천한 신앙으로 본 바이지만 대져 이와 같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신앙은 모르고도 믿을 수 있었으나, 실은 그렇게 강요된 시기도 있었지만  미래의 신앙은 모르면 자칫 미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안다는 것은 박학다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은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하고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 라고 가르칩니다.

 

 

세속주의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세상이 종교로부터 멀어질 때 교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세속현상과 대책 없이 타협(야합)해서도, 세속을 차단하고 무조건 문을 안으로 잠그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여하  간에 우리는 교회를 지켜야하고 복음을 선포해야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 외쳤든 것처럼 지금 여기에 도 세례자 요한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새로운 신약의 복음을 열어주신 것처럼 지금도 열어 주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의 눈먼 권위주의와 거기에 맹목적으로 뇌동하는 어리석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하게 지금도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위기에 봉착할 때 마다 수도원이 발흥되었고 위대한 교부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느님 나라의 꺼지지 않는 빛을 향한 지상의 순례자인 하느님의 교회를 위하여 모름지기 왕직 사도직 예언직에 헌신해야 합니다.

예언은 叡智에서 오고 예지는 믿음과 기도에서 옵니다.  

 

 

2000년 교회사상 가장 혁신적이요 제2의 성령강림이라고 일컫는 위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성령님께서 공의회문헌을 책보에 싸서 던져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수없이 많은 성직자 수도자가 이 공의회를 수용하지 못하고 옷을 벗었다고 합니다. 역시 하느님의 이름으로 엄청난 수구세력의 비난과 저지를 받은 것입니다.

바로 이 공의회 문헌이 반포된 지 장장 40년이 지났지만 공의회 정신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만큼 수용하고 있을 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로마 보다 더 로마 적이다.’라는 비판의 소리를 듣는 것은 갓 쓰고 양복 입은 꼴에 대한 비판의 소리요 주님의 소명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공의회가 천명한, 지상명령인 토착화가 제자리걸음이요 더딘 것은 사대주의 사상 탓도 있겠지만 기득권의 권위주의에서 안주하려는 탓과 평신도의 무관심과 무명과 맹신의 탓이기도 합니다.

 

 

주교서품 착좌예식을 보면 영락없이 중세 유럽 황제대관식의 재현입니다. 이 같은 현실은 아름다운 전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교계제도가 안고 있는 권위주의의 단면을 그대로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안쓰러운 현실은 그와 같은 화려한 착좌식의 모습을 마치 하늘나라의 빛인 양 착각하는 신자대중의 신앙적 의식수준입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 추기경들에게 교회가 지금 세상을 구원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두들 가톨릭 신학교를 세우는 일, 성당을 배로 늘리는 일, 사제를 늘려야 한다 등의 대답을 하였지만 교황님께선 “아니오. 각 본당에서 덕망 있고 참다운 사도적 정신을 가진 평신도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지금 우리 평신도의 위상은 어디쯤인가.

 

 

 

 

윗글 : 4587  음냐...해체선언을 넘어 라고라  

밑글 : 4585  금구요한님의 한국카톨릭교회해체선언을 넘어(1)  

 



95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번호 제목 등록일 작성자
67140 나 거기 있노라! 2004-05-20 황미숙
67130 이제 온전히 게시판을 떠납니다. 2004-05-20 김은순
67129 "2000년이지나도록"예수님께서십자가상에서내려오지(펌) 2004-05-20 김갑상
67127 성모님의 약속 2004-05-19 김근식
67126 칼부림 미군, 이젠 정말 용서 못한다! 2004-05-19 르우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