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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시리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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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균 [baeyoakim] 쪽지 캡슐

2004-05-25 ㅣ No.67296

 

 

 

 "흉 봐 가면서 닮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타산지석의 지혜로 좋지않은 전철을 밟지말자는 생각에서 저는 그동안 ’흥청망청’이라는 제목으로 3편의 글을 올렸습니다. 흥청망청의 유래와 동서고금, 각계각층의 흥청망청 사례를 공부하여 틈틈이 글을 올려 ’흥청망청' 시리즈 10편을 완성해 보려고 합니다.

 

      

         *                                        *                                        *                                        *

 

 

흥청망청 (1)

 

 

 조선 제10대의 王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에 대하여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휘 융.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또 국민일보 논설위원 박연호님 께서는 1999년 11월 26일자 칼럼에 ’벌써부터 흥청망청’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하게 했다.명칭도 기생에서 운평(運平)으로 바꿨다.

 

 또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개편하고,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도 학생들을 내쫓고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다.전국을 이처럼 접대부 양성소 및 대기소로 만들어 놓고 눈에 드는 운평은 대궐로 불러 들였다.

 

 궁중에 들어가면 명칭이 흥청(興靑)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다.그러나 흥청이라고 다 같은 흥청이 아니었다.임금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이라 하여 급수를 높였다.그렇지 못한 흥청은 반대로 지과(地科)흥청에 머물렀다.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했으니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다.그런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났다.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다니지 않나,반대로 자기가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그도 모자라 민간 유부녀도 이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다 함부로 겁탈하고,심지어 큰 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했다.

 

 그 결과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었다.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따라서 이 말에는 그 유래가 시사하듯이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는 비아냥과 경고가 함께 들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연말을 앞둔 서울 시내가 벌써부터 흥청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20세기 마지막 송년회니 새 밀레니엄 환영회니 하면서 유명호텔,고급 룸살롱 등의 예약이 넘쳐나고 있다.IMF체제라고 차분하고 조촐하게 보냈던 지난해 연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가 IMF체제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경기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도 아니다.갈수록 사회의 그늘진 곳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그럼에도 건망증 환자들처럼 이렇게 나대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후략(後略)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옵니다.

 

 

 연산군의 패륜과 방탕을 보다 못한 늙은 환관(내시) 김처선이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 앞에 나서서 말했습니다. "늙은 저는 지금까지 네분의 임금을 섬겼으나  다른 임금들은 어느 누구도 전하처럼 음란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연산군은 활을 가져오게 하여 김처선의 가슴을 향해 쏘았습니다.

 

 김처선은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늙고 천한 제가 무엇이 두려워 임금님께 바른 말을 못 하겠습니까?" 연산군은 김치선의 입에서 바른말이 나올 때마다 다리와 팔을 하나씩 잘랐습니다. 숨이 끊어지자 시체를 호랑이 우리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은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잔학하기 이를데 없는 나 이지만

 

  천한 내시가 임금에게 덤빌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끄럽고 통분한 마음

 

  깨끗한 청량수에 씻어도 지워지지 않으리."

 

 

 

(2)

 

 

 1974년 8월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8. 15 광복절 기념행사가 엄숙(嚴肅)하게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어 내려가고 있을 때, 젊은 청년하나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단상(壇上)을 향하여 달려나가며 몇 발을 쏘았습니다.

 

 그 순간 장내는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으며 단상에 앉아 있던 영부인(令夫人) 육영수여사가 비스듬히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괴 청년은 재일동포 문세광으로 알려졌고, 박대통령은 무사(無事)했으나 육영수여사는 온 국민들의 애도(哀悼)속에 끝내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때부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逝去)할 때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維新) 독제정치는 그 도(度)를 더해 갔고,  돌아가신 육영수여사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이 박대통령의 엽색행각(獵色行脚)은 흥청망청 이루어졌습니다.       

 

 대통령의 경호업무(警護業務)를 맡고있는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직접 채홍사(採紅使)로 나섰고, 중앙정보부의 의전(儀典)과장이 관립(官立) 비밀요정이랄 수 있는 궁정동 안가의 책임자가 되어 박대통령과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등 국가 최고위(最高位) 인사들의 대, 소 연회(宴會)를 차질(差跌)없이 진행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김재규 내란(內亂) 음모사건의 재판과정에서 관련 피고들의 법정진술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불려 왔던 여인들 중에는 누구나 한번 들으면 입을 딱 벌릴만한 TV탈랜트와 은막(銀幕)의 스타들인 C, L, W양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가수, 여대생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초대(招待)받은 여인들이 하도 많다보니, 어느 해에는 그 해 카렌다 모델 12명이 모두 연회에 참석한 여인으로 채워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의전과장 박선호 피고인은 법정진술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으로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두어번 김재규 부장에게 사의(辭意)를 표(表)했다고 합니다.  

 

 국내정치(國內政治)의 안정(安定)과 해외정보(海外情報)의 수집(收集), 대공수사(對共搜査) 업무(業務) 등 국가(國家)의 안전(安全)을 위해 총력(總力)을 경주(傾注)해야할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와 그 수장(首長)인 김재규 부장이, 아무리 영웅호색(英雄好色) 이라지만 국가원수(國家元首)인 박대통령의 ’아랫도리 일’에 많은 신경을 쓰고 흥청대다보니 망조(亡兆)가 들게 되었습니다.

 

 1979년 말의 국내정치는 유신체제 유지를 위한 긴급조치의 남발, YH女工사건, 부마(釜馬)사태 등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김재규 부장은 돌파구(突破口)로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만찬에서 박대통령을 시해(弑害)하는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그 날 그 장소에도 세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弑害)를 한데는 국내정치의 위기감(危機感)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밀리는 소외감(疎外感) 등이 작용했겠지만, 지근(至近)거리에서 바라보았던 절대권력자의 문란(紊亂)했던 사생활(私生活)과 그것을 말리지 못하고 도와주어야만 했던 자괴감(自塊感)도 적지 않은 영향(影響)을 미쳤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전해내려 옵니다.

 

 

 궁정동 연회에 여인들을 동원하는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단독후보는 안되며 반드시 복수로 부르는 것입니다. 복수로 하는 것은 박대통령의

      선택의 폭을 넓히려는 배려라고 합니다.

 

둘째, 한 여인을 두 번 이상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번 불러 각하와 이상한

      인연이 깊어지면 안되겠기 때문입니다.

 

셋째, 각하의 양옆에 앉히는 여인 중 한사람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타였고,

      다른 한 여인은 연예계 지망 신출내기로 선택되었습니다.

      각하는 취기가 거나해지면 둘 중에 마음에 드는 쪽으로 몸이 기울어 졌습니다.

 

 

 

 

(3)

 

 

 중국 고대(古代) 역사는 하(夏), 은(殷), 주(周) 3대 왕조(王朝)로부터 비롯했습니다. 3대 왕조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공부해 보면, 하나같이 왕조 말기(末期)에 가서는 폭군(暴君)과 요부(妖婦)들이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흥청망청 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역사적 교훈(敎訓)을 얻을 수 있습니다.

 

 

         *                    *                    *                    *

 

 

 먼저,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은 자신이 정복(征服)한 오랑캐인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바친 미인(美人) 매희(妹喜)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玉)으로 만든 침대에서 일락(逸樂)에 빠졌습니다. 걸왕은 매희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찬란(五色燦爛)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었습니다.

 

 무악에 싫증이 난 매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연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 품질 좋은 술)를 가득 채우고, 연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 양념하여 말린고기)으로 숲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의 유래(由來)입니다.

 

 걸왕과 매희는 그 연못에 호화선(豪華船)을 띄우고 연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궁녀(宮女)들이 신호(信號)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연못의 미주(美酒)를 마시고, 숲을 이룬 포육(脯肉)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락(嬉嬉諾諾)했다고 역사(歷史)는 전합니다.

 

 이같은 흥청망청의 나날이 계속되자 국력(國力)은 피폐(疲弊)하고 백성의 원성(怨聲)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夏)나라에 복속(服屬)했던 은(殷)나라의 탕왕에게 주벌(誅伐)당하고 말았습니다.

 

 

         *                    *                    *                    *   

 

 

 다음으로 은(殷)나라의 28대 군주(君主)인 주왕(紂王)은 자신이 정벌(征伐)한 오랑캐 나라에서 공물(供物)로 바친 희대(稀代)의 독부(毒婦) 달기에게 마음을 사로잡혀 그녀의 끝없는 욕망(慾望)을 만족 시켜주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습니다.

 

 주왕 또한 국력(國力)을 기울여 호화찬란(豪華燦爛)한 궁궐(宮闕)을 짓고 미주(美酒)와 포육(脯肉)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습니다. 흥청망청하는 주왕과 달기의 광태(狂態)를 보다못해 충신(忠臣)들이 간(諫)하면, 주왕은 도리어 군왕(君王)의 행동을 비방(誹謗)하는 불충자(不忠者)로 몰아 가차없이 포락지형(?烙之刑)에 처하곤 했습니다.

 

 포락지형이란 기름칠한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罪人)을 그 위로 걷게하여 미끄러 떨어져 죽게하는 일종(一種)의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사형(死刑) 방법인데, 미끄러운 구리기둥에서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죽는 희생자(犧牲者)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모습까지도 달기의 음욕(淫慾)을 돋우는 재료(材料)가 되었습니다.

 

 이같이 폭군(暴君)과 독부(毒婦)로 악명(惡名)을 떨치던 주왕과 달기도 결국 하(夏)나라 걸왕의 전철(前轍)을 밟아 주(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滅亡) 당하고 말았습니다.

 

 

         *                    *                    *                   *

 

 

 그 다음으로,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王)인 유왕(幽王)의 총희(寵姬)로서 유왕이 포국(褒國)을 토벌(討伐)했을 때 포국에서 공물(供物)로 바쳤으므로 포사로 이름지어진 미인(美人)이 있습니다.

 

 왕의 총애(寵愛)를 받아 아들 백복(伯腹)을 낳았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절대로 웃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유왕은 포사를 웃기려고 온갖 꾀를 생각한 끝에 외적(外敵)의 침입(侵入)도 없는데 위급(危急)을 알리는 봉화(烽火)를 올려 제후(諸侯)들을 집합(集合) 시켰습니다. 제후들이 급히 달려왔으나 아무 일도 없었으므로 멍하니들 서 있자, 그 것을 본 포사는 비로소 웃었다고 합니다.

 

 뒤에 유왕은 왕비(王妃)와 태자(太子)를 폐하고, 포사와 백복을 왕비와 태자로 삼았습니다. 전왕비(前王妃)의 아버지 신후는 이에 격분하여 BC771년 견융(犬戎) 등 오랑캐를 이끌고 쳐들어와 유왕을 공격했습니다. 유왕은 다시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한 사람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유왕(幽王)과 태자(太子)는 살해(殺害)되어 서주(西周)는 멸망(滅亡)하였고, 요녀(妖女) 포사는 납치(拉致)되었다고 합니다.

 

 

 

 

 

                           흥청망청 (4)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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