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17대 국회에서 다수를 점한 여당은 냉전시대의 잔재라는 국가보안법 개폐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개폐 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랜 기간 국가보안법은 자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몇몇 조항 때문에 권위주의 시대에 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악용되면서 빈번히 인권을 침해했다.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폐지돼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반민주적 악법의 대명사가 됐다. 이렇게 국가보안법은 법의 목적을 벗어나 정권에 악용된 경우가 많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과 오랜 대치 상황에서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의 개폐 논거는 항상 과거 독재정권에 의해 인권 침해에 악용된 도구라는 것과 변화하는 남북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냉전시대의 잔재로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정신에도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리 헌법이 갖고 있는 기본질서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너무 일방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행 헌법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축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적으로부터 또는 국가의 변란을 꾀하는 반국가단체로부터 우리의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기 위해, 헌법에 근거하여 제정된 법률이다. 따라서 북한이 남한의 전복을 꾀하지 않고 더불어 공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국가보안법은 적용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국가보안법 제2조는 반국가단체를 정의하고 있으나, 북한을 명시적으로 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남북 간의 교류를 금지하는 그 어떠한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 국가보안법의 존재와 관계없이 이미 남북 간에는 다양한 형태로 교류협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인도적 차원에서 이산가족의 상봉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런 화해와 상생의 변화 속에서 국가보안법은 과거 반민주적 악법이란 오명을 벗고 오히려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법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남북교류법의 개정에 있어서 다른 법률보다 우선 적용된다는 조항의 추가 문제는 법적 안정성과 남북교류의 현실성에 비추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제정 당시 그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북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법이나 제정 당시에 비해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변했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만큼 변화를 경험하면서 진전됐다. 앞으로 남북관계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의 시대가 열린다면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국방부가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主敵) 개념에서 제외하고 군사위협 등으로 바꾸는 방안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거나 주적 개념을 포기하기에는 이르다고 본다. 다만, 국가보안법에서 위헌 시비가 가장 심하게 일고 있는 찬양고무죄나 불고지죄 등은 삭제하거나 개정하여 부당한 인권 침해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도 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에서 북한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평화의 시대를 넘어서 통일의 시대를 열어야 할 동반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같이 숨쉬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헌법 현실과는 별개로 우리에게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그 헌법질서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 우리에게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평화는 국가의 안보가 확고할 때 유지될 수 있다.
김상겸 / 동국대 헌법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