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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실시된 현대적 의미의 첫 민주주의 선거는 1987년 12월16일의 제 13대 대통령선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선거는 6월 항쟁등 민의를 바탕으로 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이후의 첫 선거이기도 했다.
신민당 돌풍으로 유명한 85년의 2·12총선은 전두환 독재체제하에서 민주주의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치규제에 묶인 상태에서 진행됐다. 70년대는 유신체제였고, 60년대와 그 이전의 선거는 국민소득, 정치의식, 매스컴의 한계, 선거부정 등과 관련된 많은 근본적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13대 대선 이후 대통령선거가 세차례 더 실시됐다. 92년 12월18일의 14대 대선에서는 김영삼, 97년 12월18일 15대 대선에서는 김대중, 2002년 12월19일 16대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각각 당선됐다.
노태우-김영삼(YS)-김대중(DJ)-김종필(JP) 이른바 ‘1노3김’이 맞붙어 TK-PK-호남-충청의 극심한 지역대결을 야기했던 13대 대선 이후 한국정치에는 보이지 않는 법칙이 반복되고 있다. 충청권 민심을 얻어야 정권을 잡는다는 것, 그리고 이를위한 공약은 집권 2년을 전후해 휴지조각이 됐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 노대통령은 여소야대 타개와 정권 재창출을 노리고 YS, JP와 3당 합당을 단행한다.
92년 대선에서 YS는 JP의 도움에 힘입어 당선됐다. 그러나 YS는 95년6월 첫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JP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한다.
97년 대선 직전 이번에는 DJ가 JP를 끌어들였다. 99년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DJP연합을 한 뒤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쇠락한 JP보다 충청권 수도 이전이라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이 공약은 2년이 지난 지금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사실상 무산됐다.
이처럼 선거때마다 조금씩 경우는 다르지만 영·호남 출신의 대선 후보들이 ‘충청도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며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노무현 후보와 김대중 후보는 당선 당시 충청지역에서 전국 평균 득표율보다 각각 3.3%포인트와 3.1%포인트씩을 더 얻었다. 김영삼 후보만 전국 평균보다 5.2%포인트를 덜 얻었는데, 이는 3당 합당에 대한 거센 역풍과 정주영 후보의 인기 때문이었다.
대선주자들의 충청권 구애와 배신이 이렇게 반복된 것은 한국정치에서 충청도가 가진 지역적 특성에 기인한다. 강한 정치적 결집력을 보인 영·호남과는 달리 충청도는 상대적으로 인구도 적었고, 정치적으로 유연했기 때문이다.
영·호남을 근거로 한 대선 후보들은 ‘200만표 부족’을 채우기 위해 충청지역에 접근했다. 지역바람이 거셌던 87년 대선 당시 충청지역을 업은 JP의 득표는 182만3067표(7.9%)였고, 1위 노태우 후보와 2위 김영삼 후보의 표차는 194만5157표였다.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수도이전 여부에 관계없이 충청도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유리해 보인다. 한나라당도 충청권을 유혹할 카드를 찾으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냉철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역민심만을 유혹하기 위한 즉흥적 카드인지, 지역과 국가발전을 위해 제대로 준비된 카드인지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더이상 속지 않는다.
나아가 지역을 볼모로 한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한다. 많은 혜택을 그저 가져다 줄 것 같은 파격적 공약(公約)일수록 허황된 공약(空約)일 가능성이 크다. 실현가능성은 물론 추진주체들의 능력까지 따져보아야 한다. 3김정치 시대가 끝난 지금이 이를위한 절호의 기회이다.
이용식 / 편집국 부국장 yslee@munhw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