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3일 (금)
(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자유게시판

한국의 성지를 찾아서4(당고개:새남터가 바라보이는 언덕)!!!

스크랩 인쇄

노병규 [rbk2236] 쪽지 캡슐

2004-11-14 ㅣ No.74636

    - 야외제대-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2가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

 

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 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

 

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

 

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

 

례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순교기념탑-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

 

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

 

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성모상-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

 

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 걸식으로 묵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된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

 

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린다. 그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히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

 

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메고 희광이를 찾는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

 

에 하늘 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이에 감동한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

 

리고 먼 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

 

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을 이용, 신용산역에서 하차하여 용산 전자 상가를 지나 10여분 정도 걸어야 된다. 삼각지역에서 내려서 가도 된다.



64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