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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교수는 대학시절 국악을 전공하지 않고 서울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와 담론을 나눌 기회가 있었던 나는 그가 가야금을 전공하게 된 것은 대학 시절 법학 공부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은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법학 공부를 좋아했다고 답하면서, 보통사람이 법에 의해 위엄 있는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엄숙하고 흥미로운 일이냐고 반문했다. 그가 위대한 가야금 연주자이면서도, 탁월한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름다운 화음의 기초가 되는 법을 공부한 것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자연인 노무현이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사와 변호사 생활을 한 후,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던 것도 황 교수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바탕이 되는 헌법에 의해 나라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가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아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 준 것 역시 헌법을 지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었다. 당시 헌재가 위기에 처한 그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국민과 야당은 불만스러웠지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는 헌법에 의해 흔들림 없이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헌재가 신행정 수도 건설 특별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을 때 노 대통령과 ‘그의 사람들’은 바로 전 야당과는 달리 그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헌재의 위헌결정 후 여당은 공공연하게 불만을 터뜨리더니, 급기야 이목희 의원이 그것을 ‘사법 쿠데타’라고까지 비난하고 나섰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헌법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헌재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치 테러로서 ‘친위 쿠데타’와 다름이 없다. 이 의원이 이렇게 헌법에 의해 보장된 헌재의 판결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그 자신의 권리를 약화시킬 뿐이다. 제 아무리 헌법이 훌륭하다 해도 그것을 지키는 정신이 없으면 히틀러와 같이 헌법을 유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여당과 이 의원은 과연 몰랐을까?
헌재가 수도이전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과 여당이 편법으로 행정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적 ‘꼼수’를 쓰고 있는 것은 실제로 헌재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색 없는 법관들이 순수한 법리적인 원칙에 따라 결정한 사항을 두고 아전인수(我田引水)적으로만 판단해서 헌재를 모욕하고 거부하는 것은 장기집권의 포석을 위한 정지작업은 아닐까? 실제로 이것은 정부가 충청도에 산업도시가 아닌 위장된 행정수도 건설 계획과 4대 개혁 법안을 추진하는 문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민주화를 부르짖던 집권세력이 삼권분립의 정신을 위배해서 법 위에 군림하려는 위압적 자세는 여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선거 사범 공소시효가 만료된 지난 달 15일을 기준으로 여당 의원 29명이 기소된 것에 대해 여당의 한 초선 의원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라는 듯이 “당 지도부가 검찰과 법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라고 비난한 것은 이것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될 수 있다.
지금 여당이 시급한 경제문제 해결보다 4대 법안의 국회 통과를 서두르는 것은 여당 의원 29명이 의원직을 상실할 경우 그들의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법을 제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물론 헌법 정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영국 격언에서도 “법을 만드는 사람은 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헌법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집권 여당이 순간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헌법을 훼손하는 것은 그들이 서 있는 자리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태동 / 서강대 영문학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