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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평양에서 세례성사 있었다. 고마태오신부 육성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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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1-10 ㅣ No.77482

지난 12월31일 선종하신 고마태오 신부님은 84년 로만칼러를 한 정장을 입고 평양을 방문했다. 고향인 개성 여현에 살고있는 형님과 누나를 만나기 위한 가족방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신부라는 사실을 북한측은 알고 있었으며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키 위해 굳이 고신부님의 가족방문을 '조국방문'이라 표현했다.

"내 조국은 남도 북도 아닌 통일된 조국이오, 그러니 조국방문이라 하지말고 그냥 가족방문이라 해주시오"하면서 그는 고집을 부렸고, 그가 어릴 때 뛰어놀던 고향마을개성 여현을 방문하고 싶어 했지만 공교롭게도 남한의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이었고 북한군이 이에 대비한 비상훈련을 핑계로 전방인 개성에 외국인출입을 금하고 있어서 그는 끝내 고향에 가지 못하고 가족들을 평양으로 오게 해서 만나야 했다.

고신부님은 당시 자신이 6.25때 살려준 인민군 장교와 친형의 아이를 낳은 여인(형님의 애인)의 여동생인 '신애'(가명)와 그 얼마전에 가족을 데리고 북한으로 망명한 경원하(북한 미사일 및 핵물리학자)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그를 초청한 북측단체에 요청했으나 先軍정치체제 때문에 민간단체 요청이 묵살돼서 그들을 못 만났다 했다.

 

고마태오 신부는 다시 92년 4월에 평양에 갔고 고향마을인 개성 여현동네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서 북한당국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미사포를 입고 미사를 드렸다.

다만 자신보다 더 열심히 성당(공소)에 다녔던 누나가 43년이 지난 그때에는 "신부가 뭐하는 거냐?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해야지"하는 식으로 완전히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 안타까웠지만

수령 생일에 맞춰 평양을 방문한 프랑스신자가 호텔로비에서 로만칼러 정장을한 고신부님을 보고 "당신, 신부가 맞느냐?"하기에 "그렇다. 나는 신부다"하고..

그가 "그럼 내가 고해성사를 보고싶은데 봐 줄 수 있느냐?"하기에 "좋다. 봐준다"

하고 그 즉시 평양의 호텔에서 고해성사를 본 일이며,

희안하게도 그날 만경대예술극장에서 생일축하공연을 실황중계하는 걸 TV로 보는데 북한의 수교국가인 아프리카의 어느나라 흑인여성 성악가가 "아베 마리아"를 열창하는 것을 수령이 듣고 북한식 박수를 치는 장면을 보면서 "오! 하느님!"하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고 한다.

 

다음날 평양 모호텔 대식당에서 수령생일에 초대된 외국인을 위한 만찬회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고신부는 인민배우 오미란과 사진을 찍게되고, 그게 방영이 된 후 호텔로 그를 찾아온 여인이 한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형의 애인의 동생, 신애였다.

 

신애는 45년전에, 사회주의를 신봉하여 월북한 아버지를 찾아 고마태오의 형수가 될 번한 언니와 함께 당시 개성에 살았던 고마태오(당시 이름은 태오였다)의 도움으로 38선을 넘었다가 6.25 전에 남파되어 서울에서 프락치로 활동중에 경찰에 잡혀서 전기고문으로 자궁에 치명상을 입는 바람에 여성을 상실하고 감옥에 있다가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된 후 출옥하여 철저한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었으며 6.25에 참전하여, 간호장교로 낙동강전선까지 내려 갔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부상한 인민군 간부 2명을 대동하여 아군이 이미 점령한 지역을 빠져나가 북에 귀환하므로서 김일성으로부터 전쟁영웅칭호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후광으로 모스코바 유학을 하고 연극연출을 공부하여 가극 피바다 등을 연출한 공훈예술인 칭호로 성장했다.

 

그녀가 1960년 4.19가 나던 해. 북한 대학생연극단 연출을 맡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을 때 파리에서 신학생으로 있던 태오가 동포학생들과 함께 비엔나에 와서 잠시 두사람이 얼굴을 마주치기는 했으나 연극단 일행을 태운 버스가 금세 출발하는 바람에 서로 확인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북한에서 두번 결혼을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캐나다에서 북한으로 망명한 경원하를 통해 비엔나에서 만난 사람이 태오였고 그 태오가 고마태오라는 이름으로 캐나다에서 신부생활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뒤부터 그녀가 북에서는 비교적 높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고마태오가 쓴 모든 책을 중국을 통해 구입해서 읽으며 옛날  한때나마 그를 사랑했던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움을 낙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한다.

 

고신부 역시 지난 84년에 왔을 때도 그녀를 찾고싶어 했을 정도로 마음 한구석에 깊이 남아있던 신애를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든지 두사람은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한다.

호텔 방에 단 둘이서만 조용히 마주 앉으니 신애가

"태오씨(그녀는 고신부를 어릴 때 이름 그대로 불렀다) 책에는 숙이 얘기도 있고 현이 얘기도 있는데 내 얘긴 왜 없어요? 나는 여자로서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태오씨였어요. 태오씨와 38선에서 헤어진 후에 나는 여성을 잃었으니까요, 내가 수감돼 있을 때 형님하고 태오씨가 면회를 왔을 때만해도 난 가슴이 두근거리는 여성이었뎄시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차츰 여성임을 상실했어요. 결혼을 해도 남성을 느끼지 못했고 아이도 가질 수 없었뎄시오. 나는 오직 여자로서는 태오씨 당신 하나만을 사랑하며 이제껒 살았었뎄시오"하며 울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6.25때 인민군 간부 부상자 2명을 데리고 강원도 쪽으로 산악지대를 따라 북으로 귀환하는 데, 이미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을 지나 함흥을 간다는데 자신들은 겨우 원주를 지났으니 앞길이 참말로 캄캄 했뎃시오. 간부들 상처에는 구데기가 들끓고  서로 '나는 포기하고 이 동무만을 데리고 가시오'하는 두 간부를 여자 혼자 힘으로 끌고서 데려오려니 기가 막혔뎄시오. 어느날 배가 하도 고파서 멀리 불빛이 보이는 집을 혼자서 습격을 했뎄는데 살펴보니 혼자 사는 신부님이었소. 따발총을 겨누고 먹을 걸 내놓으라 했더니 식은 밥을 주는데 쌀이 아니라 좁쌀에 감자투성이 밥이었뎃시요"

무명천과 솜을 좀 달라했더니 일행이 더 있느냐 하면서 감자밥을 새로 해서 담아 주고 귀한 페니실린약과 다이야찡, 붕대. 발싸개 천으로 쓰라고 이불보까지 뜯어주는 그 신부님을 자기는 알생동안 잊지 못하고 살았노라고,

태오씨 형님이 사회주의 학생운동하기 전에 항상 신부가 되겠다고 말했기에 고마운 신부님을 해칠 수가 없었고 무사히 북에 귀환하여 지위가 높아지고 나서 몰래 천주교를 믿다가 인민재판에 회부된 이들을 자기 힘으로 구해 준 일이 여러번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서 선물받은, 그리고 당국에서 증거물로 압수한 옛날 성서책을 집에 두고 가끔씩 태오씨가 그리울 땐 그 성서를 꺼내 몰래 읽었노라고 하면서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 저세상에서 꼭 이루어 천국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기위해 내가 죽기전에 꼭 천주교세례를 받고 싶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고신부는 그 얘기를 듣고 내일 그 성서책을 가지고 올 때 고운 한복을 입고 오고, 소금을 좀 가져 오너라 하여 이튼날 평양의 모호텔 방에서 개성 부모님 산소에서 입었던 사제옷으로 갈아입고 몇시간의 교리문답으로서 죽음을 얼마 앞둔 옛 여인 신애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정확한 날자; 1992년 4월18일. 신애의 세례명은 베로니카였음) 성유도 준비해 가지고 갖고 다만 대모를 못 세워 성모마리아님을 대모라 해주고 그래서 세례명을 베로니카라 했다 한다.

 

  **상기 내용은 지난해 9월 23일부터 12일간 본인이 토론토에 계시는 고종옥 마태오신부님으로 부터 직접 녹취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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