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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친절이 축복이었음을 왜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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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6-04-24 ㅣ No.98580

 

어젯밤에 현대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세명대학교 이사장이며 전 국회의원 권영우 조카의 문상을 다녀왔다. 그는 나와 가까운 집안이며 같은 또래이기도 했다. 대원여객, 대원관광. 경기고속 등 운수업으로 성공했고 오늘날은 교육계에 투신하여 한방병원이 있는 세명대학교를 비롯하여 전문대, 중고등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설립하고 또한 운영해 왔지만 내가 어릴 때 고향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정규학교를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고학생 처지였다.

 

까만 무명 양복을 입고 2리터짜리 대병에 한 병은 약주를 채우고 또 한 병에는 석유(그 당시는 석유가 있어야 호롱불이라도 켤 수가 있었다)를 묶어서 손에 들고 종종 우리 시골집을 찾아 왔었다.

漢학자셨던 우리 할아버지한테 제문(祭文)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는 제사 때 제문이 없으면 제물을 올릴 수 없었던 시절이라서 영우조카 모친께서 우리 할아버지 글을 아시고 친정이나 시집제사 때 꼭 영우조카를 우리 집으로 보내 제문을 지어 가셨던 것이다.

그때 만약 내가 서울 배재학교에 다닌다는 거만만 떨지 말고 그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었더라면, 아니 우리 할아버지께서 “손이 시릴 텐데 뭘 그런 걸 손에 들고 오느냐? 살림도 어려운데 가져오지 말고 이거나 받아서 공부하는 데 보태 써라” 하고 조금이라도 따뜻한 정을 베풀어 그에게 도움을 주셨더라면 영우조카가 뒷날 크게 성공을 했었을 때 나한테나 우리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잘 했겠는가마는

아마도 그때 영우조카가 어린 심정에 서운했던 점이 많았든지 후에 같은 동대문구에 내집과 가까이 살았어도 우리는 서로 자주 내왕하지 않았고 원래 내가 선거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보니 내가 선거 때 그를 도와주거나, 내가 힘들 때 그가 나를 도와 준 일도 없이 그저 집안 대소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면 서로 안부나 묻고 덤덤하게 지내온 처지였다.

 

하지만 늘 내 마음에는 내 친척사람들이 그의 도움으로 고속도로 휴게소 운영권을 땄느니 청소용역을 땄느니 학교매점 허가를 얻었느니 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한편은 그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철없던 어린 시절 내 거만함이나 무관심으로 인해 혹시나 그가 내게 서운해 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어쨌든 나이 65세에 지병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 그의 영정 앞에서 나는 성호경을 그으며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져 남았던 마음의 앙금마저도 훌훌 털어버리고 돌아섰다.

 

남한테 정을 베풀고 또한 남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예수님의 축복임을 내가 왜 일찌기 몰랐던가 ,,,

 

비근한 예가 있기에 굿뉴스 가족분들께 소개한다.      

 

이제는 저세상 사람이지만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 이야기만 들으면 누구나 짐작이 갈 국내 굴지의 그룹회사 J회장은 원래는 화물차 운전수였다.

인천에 조그만 자동차정비업소를 하던 그가 처남과 함께 화물차 2대를 사서 운수업을 시작했던 젊은 시절에 어느 날 화물차를 운전하여 경인가도를 달리다가 길가에 고장이 나서 서있는 미군 지프차를 발견했다 한다.

당시만 해도 경인가도는 비포장 도로여서 차가 한 대만 지나가도 먼지가 펄펄 나는 신작로였는데 포플러나무 그늘에 미군장교가 한 사람 서 있었고 운전병으로 보이는 미군사병이 고장이 난 지프차를 고치느라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그의 눈에는 애처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J사장은 그곳을 지나치려다가 잠시 차를 세우고 고장 난 지프차 쪽으로 걸어갔다. 운전병이 본넷트를 열어놓기는 했지만 무엇이 고장인 줄 찾지도 못하고 그저 당황하여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는 데 J사장이 봐서는 도저히 그 사람 실력으로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자기 차로 돌아가 공구함을 들고 와서 자신이 직접 그 차를 고쳐주기로 마음먹었다 한다.

하지만 영어라고는 할로 오케이 정도만 할 줄 알았을 뿐인 그가 무어라고 말을 하는 미군장교 말은 알아듣지도 못하니 대꾸조차 못하고 묵묵히 프러그를 닦아 다시 꼽고 배선을 다시 연결하고 그러기를 약30분.

지프차는 다시 시동이 걸리면서 성능을 되찾아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있었다.

 

미군장교가 ‘땡큐’를 연발하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지만 그는 기름이 묻은 손을 내 보이며 악수를 거절하고 돌아섰다.

부탁을 하지 않았음에도 우연히 그 길을 지나다가 곤경에 처한 자기를 도와준 J사장의 호의가 미군장교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었으리라.

땡볕에 30분 동안이나 땀을 흘리며 남의 차를 수리해 주고서도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너그러운 웃음으로 공구함을 챙겨 돌아서는 J사장을 바라보던 미군장교가 그 자리를 떠나려다 말고 다시 J사장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지갑을 꺼내 그 속에서 달러 몇 장을 꺼내 J사장 앞에 내밀었다. 

하지만 J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돈 받기를 극구 사양했다.

J사장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미군장교가 이번에는 지갑 속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서 급히 싸인을 하여 J사장 손에 쥐어 주면서 언제 한번 만날 수 있게 명함의 밑 부분에 있는 번호로 전화라도 해 달라는 말을 했지만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던 J사장은 그 말이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그 명함을 건성으로 받아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J사장에게는 미군부대 타자수로 근무하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J사장이 서울에 오면 후암동에 있는 여동생의 자취방에 가끔씩 둘러서 옷을 갈아입고 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윗옷 빨래를 해 주면서 주머니를 뒤졌는데 그 주머니에서 자신이 근무하는 부대의 높은 분의 명함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J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고 한다.

“오빠. 이 명함이 어째서 오빠주머니에 있어? 누구한테 받은 건데?”

“아, 그 명함? 길에서 양키 차 고쳐주고 내가 받은 거 같은데......왜? 네가 아는 눔이냐?”

“이 명함 준 사람. 그 사람 키가 크지?”

“양키 쳐놓고 키 작은 눔 본 적 있냐?  다들 크지? 모르긴 해도 좀 높은 사람 같긴 하더라만 왜 그러는데?”

남매의 대화는 일단 거기서 끝나고 여동생이 다음 날 부대에 출근하여 확인한 결과 도움을 받은 명함의 소유자는 바로 자기 부대 지휘관이었다.

“아니! 그 장교가 너희 부대 책임자라고? 거참 인연도 묘하구나!”

J사장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후 미군병참부대장인 그때의 지프차 주인이 자기 부대의 타자수인 여동생과

오빠인 J사장을 초청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의를 했다.

자기가 뒤를 밀어줄 테니 자기네 부대에서 나오는 쓰레기처리를 맡아서하는 용역사

업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전쟁이 휩쓸고 간 직후여서 모두가 헐벗고 굶주렸던 시절이라서 미

군들이 쓰다가 버린 물건이나 먹다가 버린 음식 등은 바로 노다지나 다름이 없었다.

다시 말해 마군부대 쓰레기는 곧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버려진 깡통에 남은 고기며 콩 마카로니 등을 큰 드럼통에 넣어 푹푹 끓여서 팔았던

흔히들 ‘꿀굴이죽’이라 했던 음식이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

개’도 실은 다 그때부터 나온 음식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빈 깡통도 큰 것은 쪼개어 납땜으로 이어서 판잣집의 지붕덮개며 함

석그릇을 만들어 썼고 버려진 군복이며 털실로 만든 내복 등은 염색을 해서 입기도

하고 털실을 풀어서 아이들 양말이나 장갑을 짜주기도 했다.

 

J사장은 즉시 지입제 차량을 모집하여 용산과 의정부 캠프의 쓰레기 수거용역 사업

을 하면서 자금을 축적하여 차츰 차츰 사업의 규모와 영역을 넓혀나갔다,

다음 해에는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미국인 자녀들이 학교에 다닐 때 타고 다녔던 스

쿨버스 10여대를 불하받아 의정부-종로5가 간을 운행하는 시내버스 노선을 개설해

서 운수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용산에 있는 미군 취수장에서 의정부 캠프케이지까지 미군이 마시는 식수를

운반하는 용역일도 맡아서 사업의 범위를 넓혔다.

뿐만이 아니라 그때의 지프차 주인 미군장교가 훗날 장성이 되어 베트남진출의 교

두보 역할을 해주어 월남전에서 떼돈을 긁어모아서 고속버스, 관광,선박, 항공에 이

르는 거대한 구릅회사로 성장하였으니

 

우연한 기회에 남한테 베푼 사랑이나 조그만 친절이 바로 주님이 주신 큰 축복임을

몽매했던 나 자신을 채찍질 하며 이 기회에 굿뉴스 가족에게 꼭 얘기하고 싶었다.

 

우리 모두 신약의 새 계명인 사랑을 베풀며 삽시다. 비록 나는 그릇이 적어 그

축복의 기회를 놓쳤습니다만 젊은 교우들은 이 글을 힌번 더 읽어서라도 꼭 

가슴에 담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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