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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함에 대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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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봉 [t4153032] 쪽지 캡슐

2006-09-17 ㅣ No.104402

찬미 예수님!

 

포위된 도시처럼, 교회는 지금 현 시대의 오류와 위험들에 둘러싸여있다.

불행스럽게도,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러한 위험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안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위험들에 감염되어 있다.

 

과거의 오류들에 대한 과잉 반응은 새로운 오류들을 낳는다.

 

상대주의와 무도덕주의와 인간의 삶에 대한 실험실적인 접근 방식에

대항하여 싸우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한

신앙과 교회의 불변의 가르침들을 손상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인한다. 그러나 과거 시대의 잘못들, 예를 들면 율법주의,경직화, 및

권위의 남용 등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때로는 너무나 강하여 그들은 현

시대의 위험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 교회가 경직된 율법주의와 독단주의에 의해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그들의 직무 수행에 있어서 비의(선택된 소수에게만 전해지는 의식)를 행하였다. 여러 교황들의 가르침, 예를들면 레오 13세의 회칙.레룸노바롬(rerum novarum)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제들과 주교들은 부유층 및 권력층과 가까웠다. 그들은 빈민들의 고통에 대하여 별 관심 없는 듯이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한 폐단들이 있었음과 동시에 교회 안에는 크리스찬

애덕의 행위들과 영웅적인 전교 활동들이 있었으며, 그런 폐단들로 인하여 사회의 상층 계급에 대한 분개심이 정당화된다든가, 예전에 특히 불란서의 성직자들 일부가 감염되어있는 계급간의 증오와 투쟁의 정신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미셸 드 셍 삐에르는 그의 두 저서"새로운 신부들","성녀 꼴레르

"에서 그러한 성직자상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경우들에는 이러한 반응들이 극도에 달하여 맑시즘에 노골적인 동조를 드러내는 경우들도 있었다.

이것은 세속적인 배교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세속화, 상대주의 및 자연중의를 반대하면서도 지나친 낙관주의로 인하여 현 시대의 위험들을 무시하거나 그 위험들에 빠져들 위험에 처해있는 신학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추세들이 있을 것이다.모든

비의(秘儀)에 대한 정당한 반감이 자주 모든 교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평등주의와 손을 잡게 되었다.비의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하여 오늘날 많은 사제들은 교회의 가장 가치있는 문화적 특징중의 하나인 전례에 있어서의 신성한 분위기를 평범한 인간들을 멀리하는 비의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곳들에서 길거리의 평범한 사람에 대한 무시와 비크리스찬적인 귀족주의의 냄세를 맡고 있다.그리고 심지어 이러한 의심을 교계 제도 전반에 대하여서도 품고 있다. 독단주의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그들로하여금 심각한 자만심의 위기에 빠지게하며, 현 시대를 특징짓고 있는 비신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게 한다. 그들은 종교에서 신성함이 가지는

기본적인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예: 기타와 재즈 음악을 미사에 도입) 그리하여 그들은 신성함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하며 따라서 참된 신앙심을 손상시킨다. 그들의 민주적인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동경하는 모든 이들이 신성함을 동경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하며 신성함과 속된 것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게 한다.

거룩함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준다.

 

주여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직접 친교하는 것과 그분을 우리 이웃 안에서 발견하는 것과는 엄청난 거리가 존재한다.무한히 거룩하신 분과 직접 일치되는 것은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동경이어야하며 우리가 희망할 지복(至福)이어야 한다.우리의 이웃을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통교와 같은 수준으로 놓는 것은 엄연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께 행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친교로부터와 우리의 이웃들과의 친교로부터 같은 지복이 성취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우리의 이웃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애덕의 결실이다. 그리고 애덕은 그리스도와의 나와 너로서의 직접적인 친교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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