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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126위중 126,최양업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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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구 [xhak59] 쪽지 캡슐

2004-04-01 ㅣ No.64521

126 최양업 토마스(신부,다락골 문경 1861년 6월 10일 40세) 병사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로 관명은 정구이다.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는 최한일의 후손이고,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손녀로써 독실한 천주교 신자 가정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1836년 1월 12일 목숨을 걸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써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신부에 의해 최방제, 김대건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1844년 12월 15일 만주 소팔가자에서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849년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김대건 신부 다음으로

두 번째 방인 사제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에 변문을 떠나

입국에 성공하여 6개 도를 두루 다니며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산간벽지 만을 찾아다니며 1년에 7천리를 다니며 4.000여명의 고해를 들었다.

그리고 1857년에는 베르뇌 장 주교에 의해 다블뤼 주교가 서울에서 주교로 성성되었을때

고조선 최초의 성직자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 최양업 신부도 참석했다.

최양업 신부는 공소 집에서 잡힐 뻔하기를 여러 번 당하여, 밤에는 피하고 낮에는 숨으며 온갖 위험을 겪어 가면서 경기·충청·경상·전라·강원·황해도 등으로 전교하여

1년에 6∼7월 두 달 동안만 본댁에 계시고, 그밖에는 전국 산골로 돌아다니며

12년 동안 전교 하셨다. 그러다가 무더운 1861년 6월 문경에서 점심은 못 먹고

약주만 몇 잔 잡수셨는데, 잘 마련하지 못한 소고기를 잡수시고 크게 체하시어

말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시었다. 신부를 모시고 다니던 복사가 민망히 여겨 여쭙기를 "너무나 불편하신 모양이오니 이 문경읍의 평창 이씨라는 교우 집이 패약(약국)을 하고 있사오니, 그 집으로 들어가셔서 치료하심이 필요한 줄로 아옵니다. 그 집으로 가십시다." 하고 간신히 이씨 집으로 들어가 치료하였으나, 백 약이 무효하고 증세가 날로 위중하셨다. 제천 배론에 신 푸르티에 신부께 병보를 고하니, 즉시 오시어 최후의 성사를 받고,

1861년 음력 6월 10일에 편안히 선종 하셨다.

신 신부님의 주선과 지도로 상여를 꾸며 제천 배론의 신학원 뒷산에 안장한 뒤에

최 신부의 둘째 동생 야고보가 상경하여, 장 주교를 뵙고 애절한 기별을 했다.

주교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도 슬프냐? 나는 주인을 잃었다." 하시며 몹시 슬퍼하시었다.

그 뒤에 혹독한 큰 군난으로 산소를 손질 못하고, 수십 년이 지나서 천주의 은혜로

군난이 잠잠해지고 교우들이 배론 마을에 모여 살며, 벌초하고 산소를 돌보면서

태평성대를 만나 안락한 세월을 누리다 안 회장이

"우리 선조 두 번째 탁덕 최 신부의 공덕을 기려 우리들이 표석 하나를 세우자"하고

비석을 준비하였다가 일본인의 방해로 세우지 못하고 해방이 되는 즉시 세웠는데

비석 앞면에는 [사제도마최정구지묘(司祭篤瑪崔鼎九之墓)]라 하였고,

뒷면의 비문에 내력이 자세히 적혀있다.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권429, 하권35, 97, 146,153, 180,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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