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더보기
2026년 11월 8일 (일)
(녹)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자유게시판

역사 속 강경론자,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

스크랩 인쇄

양대동 [ynin] 쪽지 캡슐

2005-01-08 ㅣ No.77447

토요 이슈] 매파, 그 소신과 열정의 끝

역사 속 강경론자,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

 풍전등화 같던 19세기 말 조선에 두 인물이 있었다. 최익현과 김옥균. 애국심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노선은 달랐다. 최익현은 개화 불가론자(위정척사파)였다. 반면 김옥균은 '벼락 개혁'(급진개화파)을 주장했다. 이들은 각각 난세에 자기가 선택한 노선이 불가피하다고 믿었고, 그 노선을 지키거나 실현하기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기울어진 나라를 세우지 못한 걸 보면 그게 최선의 길이었는지엔 의문이 있다.

◆ '한때 득세, 결국 몰락'의 패턴=광복 이후 현대사에서는 한때 강경파가 득세하다 몰락하는 패턴이 반복해 벌어지곤 했다. 최익현.김옥균처럼 애국하는 방법의 차이로 생긴 강경 노선을 견지한 이들도 있지만 이와 달리 권력을 등에 업은 강경파도 많았다.

자유당 시절에는 최인규 당시 내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 체제 강화를 위해 3.15 부정선거를 주도하다 4.19를 맞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3선 개헌을 주도했다.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당시 김형욱 부장이 지휘하는 정보부가 김영삼씨가 타고 가던 자동차에 초산을 뿌렸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김형욱의 권력은 무소불위였다. 충성파 차지철 경호실장도 대통령의 권력을 등에 업고 부마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장하다 자신과 박 대통령의 목숨을 빼앗은 10.26을 자초했다. 전두환 정권에선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학원안정법, 직선제 개헌 운동을 정면 거부하는 4.13 호헌 조치 등 각종 강경 정책을 기획해 추진했으나 나중에 권력 남용 등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이 같은 역사는 최근까지 반복된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노동법 개정 협상이 야당의 반대에 부닥치자 새벽 날치기를 감행한다. 이는 국민적 반감을 샀다. 정권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안정남 국세청장을 앞세워 세무조사로 언론사를 대대적으로 압박했다. 하지만 정권의 지지율은 추락했고, 안씨 자신은 축재 의혹에 대한 추궁을 피해 해외로 도피했다.

◆ "목숨이 아까운가"=일본에는 별난 강경파 얘기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다. 전쟁을 수행할수록 일본 육군 내에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당시 군 작전 회의에서 강경파가 온건파를 제압하는 마지막 무기로 사용하곤 했던 한 마디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당신은 목숨이 아까워 그러는 것 아닌가"였다. 이 한마디에 토론이 없어졌고 이렇게 결정된 육군의 전략 기조는 확전, 또 확전이었다.

역사는 성공한 강경 노선도 기록하고 있다. 고려 말 친원파 권문세족에 대항한 신진사대부 중 강경 개혁을 주장한 이들이다. 신진사대부엔 고려를 변화시키되 왕조는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정몽주.이색(온건 개혁파) 등이 있었는가 하면, 아예 정권교체를 주장한 정도전.조준(강경 개혁파) 등도 있었다. 강경 개혁파는 온건 개혁파와 갈등하다 이성계 등 신흥 무인세력과 손을 잡고 조선을 건국했다.

◆ "실용과 관용 풍토 확산"=경희대 허동현(근.현대사)교수는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는 선명성을 내세우는 극단 세력들이 서로 부닥치면서 온건.중도의 입지가 약화돼 왔다"며 "특히 강경론은 권력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다른 사람과 대화를 거부하는 강경론은 갈수록 구시대적인 것이 돼 가고 있다"며 "권력이 분산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강경론보다 실용과 관용을 중시하는 풍토가 점차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용호.김정하 기자 <novae@joongang.co.kr


7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